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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의 밤] - 박훈정 표 누아르, 스토리는 단순해졌지만 감정의 폭은 넓어졌다.
13  쭈니 2021.04.13 11:17:59
조회 127 댓글 3 신고

감독 : 박훈정

주연 : 엄태구, 전여빈, 차승원, 박호산

2020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불어닥친 코로나19의 광풍은 결국 한국 영화 생태계를 교란시켰다. 거액의 제작비가 들어간 흥행 기대작들은 개봉을 미루기 시작했고, 코로나19 장기화로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자 극장이 아닌 OTT라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2020년 4월 23일 넷플릭스에 공개되며 논란이 있었던 [사냥의 시간]을 시작으로 [콜], [승리호] 그리고 [낙원의 밤]까지 극장이 아닌 OTT를 선택했다. 그리고 최근 개봉을 앞둔 [서복]은 극장 개봉과 티빙에 동시 공개되는 새로운 도전을 선언했다. 코로나19가 당장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앞으로도 이런 식의 OTT 공개는 계속될 전망이다.

[낙원의 밤]은 특이하게도 주연 배우의 이름이 아닌 감독의 이름을 내세워 영화를 홍보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낙원의 밤]의 주연은 엄태구와 전여빈으로 배우로서의 인지도는 아직 크지 않다. 엄태구는 한준희 감독의 누아르 [차이나타운]으로 주목을 받은 후 [밀정], [안시성] 등 흥행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했고, 주연을 맡은 [판소리 복서]는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사정은 전여빈도 마찬가지이다. 김의석 감독의 독립 영화 [죄 많은 소녀]로 주목을 받은 후 [천문 : 하늘에 묻는다], [해치지않아]에 출연했지만, 그녀의 대표작은 최근 인기리에 방영 중인 tvN 20부작 드라마 <빈센조>이다.

그와는 달리 박훈정은 감독으로는 드물게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악마를 보았다], [부당거래]의 각본가로 영화계에서 명성을 쌓은 후 [신세계], [브이아이피], [마녀] 등 자신만의 색깔이 확실한 영화들로 필모그래피를 착실하게 쌓고 있다. 특히 2013년에 개봉한 [신세계]는 한국형 누아르의 한 획을 그은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2의 [신세계]를 선언한 전통 누아르 [낙원의 밤]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은 엄태구도, 전여빈도 아닌 박훈정 감독일 수밖에 없다.

극장에서 다른 관객들과 함께 비정한 분위기에 젖어 [낙원의 밤]을 볼 수 있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누아르를 싫어하는 아내가 잠든 틈을 타서 거실 TV의 음량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아내가 깰까 봐 조마조마 해하며 조용히 [낙원의 밤]을 볼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꽤 재미있었다. 하지만 제 2의 [신세계]의 경지에 도달한 영화는 분명 아니다. [신세계]를 봤을 때는 젊은 시절 봤던 홍콩 누아르 영화의 전설 [영웅본색], [첩혈쌍웅]과 비슷한 희열을 느낄 수가 있었지만, [낙원의 밤]을 봤을 때는 그저 '재미있네.'라는 감정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낙원의 밤]은 거의 대부분의 누아르 영화가 그러하듯이 범죄 조직에 몸을 담고 있는 박태구(엄태구)가 주인공이다. 그의 유일한 가족은 시한부 판정을 받은 누나(장영남)와 어린 조카. 태구는 어린 조카에게 남다른 애정을 과시한다. 하지만 의문의 교통사고로 누나와 조카가 죽자 사건의 배후에 북성파가 있다고 의심을 하며 혼자 북성파의 보스 도회장(손병호)를 만나 칼을 꽂는다. 보스의 양사장(박호산)의 도움으로 북성파를 피해 제주도로 향한다. 제주도에서 총기를 밀매하는 쿠토(이기영)와 쿠토의 조카 김재연(전여빈)의 집에 몸을 숨긴 태구. 하지만 북성파 이인자 마이사(차승원)가 점차 올가미를 조여 오고, 결국 양사장이 태구를 배신함으로써 제주도에도 피바람이 몰아닥치는데...

솔직히 영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영화의 전개 자체가 예상했던 대로 흘러 간다. 양사장의 배신, 태구 누나의 죽음에 얽힌 진짜 배후 등 깜짝 놀랄만한 반전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재미있었던 이유는 감정선이 꽤 풍부하기 때문이다. 일단 엄태구와 전여빈의 연기가 조화를 이룬다. 살인을 일삼는 조폭이지만 인간미를 간직한 태구와 죽음을 앞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 반항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재연의 캐릭터는 엄태구와 전여빈의 연기에 의해 매력적으로 구축된다. 그리고 차승원이 연기한 마이사는 악역인데도 매력적이고, 박호산이 연기한 양사장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비열하다. [신세계]에서도 그랬듯이 [낙원의 밤] 또한 명품 배우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영화의 재미를 증폭시켰다.

[낙원의 밤]에서 또 한 가지 좋았던 것은 태구와 재연에게 억지스러운 연애 감정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태구는 재연에게 죽은 누나와 어린 조카의 모습을 발견한다. 만약 태구의 누나가 병으로 죽음을 맞이했다면 태구는 쿠토가 그랬듯이 조카를 부양해야 했을 것이다. 재연이 태구의 누나와 마찬가지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 또한 태구에겐 재연을 지켜야 한다는 무의식을 심어 놓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재연이 마이사에게 인질로 잡혔을 때 태구는 주저하지 않고 재연을 구하기 위해 불구덩이로 뛰어든다.  

재연도 마찬가지이다. 재연의 부모는 삼촌인 쿠토의 이권 다툼으로 상대 조직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렇기에 쿠토에 대한 재연의 감정은 부모를 죽인 원흉과 자신의 유일한 보호자라는 상반된 감정에 갇혀 있다. 쿠토와 같은 조폭인 태구를 향한 재연의 감정이 처음에 반감으로 시작된 이유이다. 그런데 쿠토가 살해를 당하자 재연에게는 쿠토에 대한 원망보다는 슬픔만 남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불구덩이에 뛰어든 태구에게서 쿠토의 모습을 투영시킨다. 재연이 복수를 위해 총을 들은 것은 그렇기에 당연한 일이다. 보호자가 없는 그녀는 어차피 죽을 운명이 아니던가. 어쩌면 태구와 재연이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무모한 선택을 했다는 설정이 가장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단 며칠 만에 태구와 재연이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억지스럽게 비칠 수가 있었다. 결국 박훈정 감독이 선택한 것은 재연에게 누나와 어린 조카를 본 태구와 태구에게 삼촌의 희생을 느낀 재연이다. 이러한 설정은 전혀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다.

[낙원의 밤]의 백미는 영화 마지막 장면이다. [낙원의 밤]은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내가 예상했던 흐름으로 영화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마지막 10분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내 예상대로였다면 태구가 재연을 구하고 죽음을 맞이하고, 재연을 태구의 희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수술을 받는, 대강 뭐 그런 흐름이다. 태구에게는 수 십 명의 북성파 조직원들을 물리칠 총이라는 최강의 무기도 있지 않던가. 하지만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영화는 진행된다. 그리고 그런 의외의 전개는 나에게 짜릿한 쾌감을 안겨준다. 물론 누아르라는 장르에 걸맞게 영화는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맞이하는 비극적인 결말. 영화가 끝나고 나서 내 가슴이 먹먹해진 이유이다. 누아르는 그런 맛으로 보는 것이다. 비극적 결말을 향해 내달리는 주인공의 운명. 박훈정 감독은 역시 한국형 누아르의 장인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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