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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시 모음> 임보의 '아내의 잠' 외
21 도토리 2011.09.28 00:56:07
조회 1,371 댓글 0 신고

<잠 시 모음> 임보의 '아내의 잠' 외

+ 아내의 잠

우리 내외의 잠버릇은 서로 다르다

나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데
아내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나는 팔다리를 펴고 반듯하게 누워 자는데
아내는 몸을 새우처럼 구부리고 옆으로 잔다

내 코고는 소리는 요란하다는데
아내의 코는 피리를 연주하는 수준이다

나는 포근한 요를 좋아하고
아내는 따끈한 방바닥을 즐긴다

새벽쯤 깨어보면
나는 요 위에 누워 있는데
아내는 요 밑에 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의 요는 S자로 구부러져
나와 아내를 갈라놓은 울타리가 된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 아니라
별상이몽(別床異夢)인 셈이다

그래도 반 백 년 동안 여태
한 방에서 버티고들 있다
(임보·시인, 1940-)


+ 잠

내 몸 구석구석
튜브란 튜브는
두꺼워질 대로 두꺼워지고
붉은 녹 가득 낀 채로

내 몸 가운데
단 하나 모터는
낡은 양수기처럼 힘에 부쳐
툴툴거리는데

갈수록 잠은 달콤해
하루가 일생인 양
아침이면 그래도 좀 생생했다가
점심 먹으면 꺾어지고
저녁이면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
이윽고 잠에 이르면
잠이 죽음처럼 깊다

하룻밤에도 두 번 오가는 적막한 강
밤이면 세상일 까마득히 잊고 죽었다가
새벽이면 미로같은 좁은 골목길을
더듬더듬 다시 걸어 나오는
잠은 내 죽음 연습
(윤재철·시인, 1953-)


+ 아름다운 잠

우리 어머니
눈 감기 사흘 전에
곡기 딱 끊으셨다

몸부터 깨끗이 비워낸 뒤

평생의 외로움과
일체의 미움 버리고
비로소
깊은 단잠에 드셨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평온한 얼굴로
(고증식·교사 시인, 강원도 횡성 출생)


+ 잠옷을 갈아입으며
  
잠옷을 갈아입으며 나는
스스로 입는 수의를 생각한다

먼길 떠날 채비를 하듯
머리카락 순히 눕혀 빗질을 하고
비로소 이대로 출발할 수 있을 듯한
설레임

이제는 나를 조여 웅크리거나
부풀려 철없이 풍을 떨거나
고달피 날을 세워
싸우지 않아도 되리

설령 내일 아침 이대로
눈을 뜨지 않더라도
순종하는 자의 천진함
나는 새벽 이슬처럼 다시
순결해지리

자리를 펴고 누우며 나는
스스로 삽질하는 쾌적한 무덤을
생각한다
긴 강에 띄우는
한 척 종이배의
못 믿을 희열을 나는 누린다
(이향아·시인, 1938-)


+ 아기의 잠

산에 오르면 지상에서도 천국을 만난다
엄마가 보드라운 요에 재워놓은 아기
엄마는 그 방에 없어도
혼자 꿈을 꾸며 웃는 아기
눈뜨고 울면 금방 얼마가 뛰어오겠지만
그래도 깜박 잊고 그 세상에 폭 빠진 아기
산에 오르면 항상 천국의 아기가 되는 아기
겨울 산이 포근한 엄마 품 같다
허망의 덕이겠지
새둥지 같은 고독에 싸여
세상을 집어던진 덕이겠지
(이생진·시인, 1929-)


+ 새우잠 - 아버지

아버지 잠든 아버지의 등은 새우를 닮았다
열 여섯 어린 나이에 바닷일을 배워
평생을 갯바람 속에서 살았다

그의 생애는 이제 낡은 폐선처럼 기울고
등댓불도 없는 밤바다를 헤매듯 목숨 걸고 살아온
청태靑苔같은 젊은 날이 바다 속에 썩었지만
그는 아직도 돋보기 너머로 낡은 그물코를 깁고 있다

언제나 등 따순 세상을 만나 허리 펴고 잠들 수 있을까
오늘도 웅크린 아버지의 잠 속에는
콜록콜록 밤기침 소리만 높다
(김경윤·시인, 전남 해남 출생)


+ 못 위의 잠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 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 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나희덕·시인, 1966-)


+ 그녀가 잠들어 있어요

쉿 그녀가 잠들어 있어요
깨우지 말아요
세상 모르고 잠든 그녀
깨우면 우수수 쏟아져요
과일 바구니에 걸쳐 앉은
그녀의 길고 긴 시름
한시름 놓고 잠든
할머니의 이마에 내려앉은 먼지들

깨우지 말아요
찢어진 한 쪽 바지 속으로
속고쟁이 보여도 그냥 두어요
푸릇푸릇 갓 뽑아온 배춧잎
밤새워 고른 여린 파잎들
속고쟁이 빼애끔 고개 내밀어요
할머니의 손톱 끝에 끼인
아직 정겨운 흙들 쏟아져요

깨우지 말아요
곤한 별들마저 잠든 신새벽
새하얀 머리 이고 가까스로 걸친
널판지에 기대어 잠든
그녀를 깨우지 말아요
그냥 두고 가세요
그대 가슴에서 쏟아져 나온
때묻은 동전들
누런 과일 박스에 두고 가세요
그녀가 잠들어 있어요
(김동욱·시인)


+ 잠

그는 나의 원활한 삶을 위하여
몸을 허락해온 유일신
그리하여 밤마다 그가 강림하시면
예의범절 다해 깍듯이 맞이한다

먼저 옷부터 홀가분하게 벗고
자리 깔고 누워
그가 내 안에 서슴없이 들어올 수 있게
눈감은 채 다소곳이

이팔청춘 시절엔 생파리 같은 짝사랑이 안타까워
더러 말똥말똥 벋댄 적도 있었지만
뒷날 어김없이 찾아온 후회
진종일 비실거리기 일쑤였다

그가 만족하고 나를 빠져나갈 때까지
사경을 헤매고 나면
몸이 개운해 나라님도 부럽잖은
꿀맛 같이 중독된 사랑
(권오범·시인)


+ 피곤에 지친 낮잠

추석명절 며칠 전부터
고달픔 끌어안고 씨름하던 나의 몸
깊은 잠에 빠지고 싶어
몸살 한다

이른 새벽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 떠나간
텅 빈방에 홀로 누워
저린 다리 올려놓고 가라앉는다

야! 밥 먹자
쇳소리 같은 어머니 목소리에 놀라
잠결에 진지 상 얼른 차리고
무거운 몸 다시 누인다

즐겁고도 지겨운 추석명절
또 한번 치르느라 해 넘는 줄 모르고
해파리처럼 늘어져서
꿈속을 헤맨다
(김귀녀·시인, 1947-)


+ 돼지의 잠

밥을 달라고 그러는지
돼지가 꽥꽥 악을 쓴다
시끄러워 책을 읽다 말고 밖으로 나가
바가지를 찾아 들고 돼지에게로 다가가자
그는 거품을 하얗게 물고 끙끙거린다

썩은 감자며 호박씨며
알이 덜 여문 옥수수가 둥둥 떠 있는
구정물을 바가지로 퍼주자
그는 대가리를 처박고 먹기 시작한다
우적우적 수수깡을 깨물랴
꾸륵꾸륵 구정물을 삼키랴
그는 정신없이 바쁘다
젖꼭지를 찾으려고 빽빽거리는
새끼들의 울음마저도 잊은 지 오래다

핏발 선 눈
씩씩대는 코
탐욕스런 입
살진 목덜미
축 처진 배
이제 그는 짧은 다리로는
더 이상 제 무게를 가눌 수 없어서인지
바닥에 몸을 눕히더니
이내 코를 골기 시작한다

행복한 돼지의 잠
이런 잠을 나는 돼지에게서만 본 게 아니다
어느 중산층의 가정에서도 본 적이 있다
(김남주·시인, 1946-1994)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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