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첫번째가 나를 - 김혜수
뚜르 2022.09.23 06: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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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첫번째가 나를 - 김혜수

모든 첫번째가 나를 끌고 다니네

 

아침에 버스에서 들은 첫번째 노래가

하루를 끌고 다니네

나는 첫 노래의 마술에서 풀려나지 못하네

태엽에 감긴 자동인형처럼 첫 노래를 흥얼거리며

밥을 먹다가 거리를 걷다가

흥정을 하다가 거스름돈을 받다가

아침에 들은 첫번째 노래를 흥얼거리네

 

모든 첫번째 기적들이 나를 끌고 다니네

 

첫 떨림 첫 경험과 첫 사랑과 첫 눈물이

예인선처럼 나를 끌고

모든 설레임과 망설임과 회한을 지나

모든 두번째와 모든 세번째를 지나

모든 마지막 앞에 나를 짐처럼 부려놓으리

나는, 모든, 첫번째의, 인질,

 

잠을 자면서도 나는

아침에 들은 첫 노래를 흥얼거리네

나는, 모든, 첫 기척의, 볼모

 

 

시집 『이상한 야유회』(창비, 2010)

 

 

첫 만남, 첫 인상, 첫 키스, 첫 경험, 첫 사랑... 우리의 생은 첫 걸음을 떼면서부터 모든 ‘첫’과 마주치며 떨림과 설렘 그리고 두려움을 갖는다. 이름이 닮은 김혜순 시인의 ‘첫’에서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당신의 첫,’이라 했다. 그러면서 그 ‘첫’은 ‘아마도 당신을 만든 어머니의 첫 젖 같은 것. 그런 성분으로 만들어진 당신의 첫.’이라고 했다. 이에 비해 배우 아닌 시인 김혜수는 ‘모든 첫번째가 나를 끌고 다’닌다고 한다. 아침 출근길 버스에서 들은 ‘첫번째 노래’에 필이 꽂혀 ‘태엽에 감긴 자동인형처럼’ 종일 첫 노래를 흥얼거린다.

하지만 첫눈은 누군가의 의해 밟혀지고, 첫날밤은 또 누군가에 의해 매정하게 찢기어지는 법. 첫 눈물과 첫 상처가 ‘예인선처럼 나를 끌고’ ‘모든 두번째와 모든 세번째를 지나’ ‘모든 마지막 앞에 나를 짐처럼 부려놓’는다. 첫 단추, 첫 기회가 그렇듯이 ‘모든, 첫번째의, 인질’이고, ‘모든, 첫 기척의, 볼모’인 ‘나는’ 언제나 처음 탄 밤기차 안에서 과자봉지를 부스럭대듯, 첫 화투 패를 받아들고 천천히 쪼듯 다음 열차를 기다린다. 우리에게 다가왔던 그 숱한 ‘첫’들. 왜 사람들은 '첫'이란 형용어구 뒤에는 늘 '사랑'이나 '경험'만을 떠올리는지.

또 그 경험은 '그것'으로만 요약되는지. 필름이 돌아가며 지지직거리고 끊긴 것들, 혹은 생생한 것들. 그러나 돌아갈 수 없는 세상의 모든 ‘첫’들. 남아있는 앞으로의 생에도 새로운 메뉴의 ‘첫’들이 있을까. 떨림의 진동은 잦아들겠으나 무언지 모를 얼마간의 ‘첫’들. 어쩌면 새벽녘 연탄가스를 처음 들이마시고서 방문 밖으로 나왔을 때 그 어질어질함 속에서 담장을 가로지르며 걷는 검은 도둑의 실루엣을 처음 목격했을 때처럼 두려움에 떨며 ‘도둑이야!’하고 소리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첫 죽음을 맞아할지도 모른다.

첫 세상에 나올 때 크게 울었던 첫 울음처럼 언젠가 맞이할 죽음도 두려움이면서 신비이기를 바라건만.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죽기 직전 가족들과 친구들 앞에서 “지금까지 고마웠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식을 잃거나 입을 달싹할 틈도 없이 눈을 감는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라며 짐짓 여유를 부리거나 버킷리스트를 점검할 시간을 꿈꾸는 건 말짱 황일지 모른다. 생을 마감하는 이들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다는 네 가지 후회, 조금 더 즐기고, 사랑하고, 웃고,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을 ‘짐처럼 부려놓을’수나 있을지.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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