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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다시 추석입니다
100 뚜르 2021.09.20 11: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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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당신을 조용히 부르고 나면 늘 가슴이 먼저 시려지곤 합니다.

근대사를 지나온 이 나라의 어머니치고 누군들 그 삶이 호사스러웠겠습니까만 당신의 삶은 유독 곤고한 것이었습니다.
 

사신(死神)이 날뛰던 전란 중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남편과 사별한 뒤 30년 세월을 당신은 오직 신앙에 

의지하여 삶의 무게를 견뎌내었지요. 돌아보면 당신의 생애에 당신 자신의 삶은 없었습니다. 당신의 삶은 

늘 자식들의 삶에 묻혀 있었습니다.

 

어머니, 허(虛)하기 짝이 없는 어른이 되어 도회의 한 귀퉁이를 휘적휘적 걸어가다가도 문득 어렸을 적 등을 

쓸어 주던 당신의 까칠한 손이 그리워 허공을 바라보곤 합니다. 그러나 좋은 일로 당신에게 먼저 달려갔던 

기억이란 별로 없군요. 삶에 지치고 힘겨워 어딘가에 가서 실컷 통곡하고 싶을 때에만 나는 당신을 떠올리곤 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 이제 다시 추석입니다. 형제들은 모였지만 그러나 이곳에 당신은 계시지 않고 고향집 마당엔 잡풀만 우거져 있습니다. 키 큰 감나무도, 마당에 서걱대고 구르는 마른 잎도 쓸쓸하기만 합니다. 언젠가 추석날 밤 

고향집 마루에 나와 앞산 위로 둥글게 떠오른 달을 보며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기억하시나요? 그때 제게 

“땅과 근본을 잊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지요.
 

바빠서 추석에 못 내려가겠다고 전화를 드렸던 어느 해에도 당신은 똑같은 얘기를 하셨습니다. 

“에미는 잊어도 좋다. 하지만 땅과 근본을 잊을까 염려되는구나.”
 

이제는 참으로 회한이 되어 남은 것이 바로 추석과 설에 한번씩 당신에게 가는 것마저 왜 그토록 인색했던가 하는 점입니다. 어머니와의 마지막 추석을 보내고 서둘러 상경하던 어느 날 아침이었지요. 찻길이 너무 

고생스러워 이제는 내려오기 어려우니 내년에는 어머니께서 올라오시는 것이 좋겠다고 했을 때 차에 짐을 

실어주시며 말씀하셨지요. "내년 추석 얘기는 하지 말아라. 내가 집에 없을지도 모르는데….” 제가 물었지요. “어딜 가시는데요?” “아주 좋은 델 갈지 어떻게 알아….” 무심하게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그때 노안(老眼)의 

주름가로 번지는 습기를 저는 그만 보고 말았습니다. 말씀처럼 이듬해 추석이 오기 전 당신은 늘 그리워한다고 하시던 그 곳, 이별 없고 눈물 없는 곳으로 떠나셨습니다.
 

어머니, 이제 돌아보니 저는 당신께서 그토록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두 가지를 잊어버리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추석 때 내려오기를 그토록 원하셨던 것도 어쩌면 토란국, 쑥국 끓여 주시면서 많이 먹으라고 아들, 딸, 손자들 등을 두드려 주고픈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느끼게 됩니다. 아스팔트를 헤매다 돌아온 자식들에게 당신은 우리가 나서 자란 그 땅의 원리와 사람의 도리 같은 것을 추석 명절을 통해서나마 일깨워주고 싶었던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어머니, 올해도 저 앞산 위로는 추석 달이 밝게 떠오르겠지요. 그토록 방랑과 자유를 원하며 당신 곁을 떠났던 자식들은 이제 하나둘 돌아와 고향집 마루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아주시던 당신은 이제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옛 삼한적으로부터 아슴하게 푸르던 하늘을 이고 있는 고향집 여기저기에서는 예나 다름없이 이름 모를 풀벌레와 날것들이 저희들끼리 뒤엉켜 있군요. 그 목숨붙이들이 생명의 기쁨으로 뒤엉켜 있는 땅을 바라보며 저는 새삼 당신이 바로 이 땅의 원초적 힘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고향집을 지키던 당신의 그 온후한 미소야말로 온갖 세월의 풍상과 슬픔을 곰삭여낸 이 나라의 어머니들만이 지닐 수 있는 미소였다는 것을 이제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다시 만날 수 없는 그 미소가 말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어디 먼 발치에서나마 단 한번만이라도 다시 보고 싶은 나의 어머니여.  
                                        
                           김병종 / 화가,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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