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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밤 /유미애
100 뚜르 2021.07.20 08: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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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밤 /유미애

 

그 손에 잡히기 전까지 바다는 내게 없던 말이다

 

나를 깨운 그는 또 다른 상자 속의 사람

아침이면 우리는 연둣빛이 다녀간 종아리를 긁었다

밤새 모서리가 쏟아놓은 얼룩덜룩한 비명들

나는 한 번도 바다를 본 적 없지만

출렁이는 무늬를 감춘 그의 등이 바다의 색일 거라 믿었다

 

나지막해지는 자신이 그는 좋다고 했다

깎이고 부러지는 데는 이력이 났다 했다

나는 매일, 화석이 된 그의 눈물을 캐내어

싱싱한 이파리들을 베꼈다

돛배와 등대를 그리고, 그가 놓친 여우를 기다렸다

 

그림자를 한껏 젖힌 나팔수 뒤로

복사꽃 그늘을 풀어헤치듯 앳된 여자가 웃었다

 

그림이 완성될 때마다 내 시간도 한 겹씩 벗겨졌지만

핏자국 선명해지도록 나를 벗겨냈다

 

마침내, 숲 한 채가 송두리째 뽑혀왔을 때

그믐달처럼 휘어진 그를 배에 실어 보냈다

 

바다의 램프를 끄고 그의 상자에 못질을 했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가 바로 나였다는 걸

일생동안, 발가벗겨진 채로 울고 있었다는 것을

 

   

ㅡ 『애지』(2021,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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