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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구달
7  여주산병 2014.12.05 02:38:03
조회 11,537 댓글 0 신고

 

출생-사망1934.4.3 ~
별칭침팬지의 어머니
국적영국
활동분야동물학(침팬지 연구)
출생지런던
주요수상내셔널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 허바드상, 알버트 슈바이처상, 교토상, 에딘버러메달
주요저서《내 친구 야생 침팬지》 《인간의 그늘 아래서》 《침팬지와 함께 한 나의 인생》 《내가 사랑한 침팬지》

 

 


침팬지의 친구이자 전세계 스타들의 롤모델,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제인 구달’

 

20여 년 전 돌연 자신의 모든 업적과 개인적인 삶을 포기하고 
 지구 환경보호에 뛰어든 그녀의 열정과 용기, 
 그리고 그녀를 지지하는 이들이 들려주는 가슴 뜨거운 이야기… 
  
 당신의 삶을 변화시킬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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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안젤리나 졸리와 제인 구달

침팬지의 친구이자 세계적인 환경운동가 
 스타들의 스타, 전세계 에코브리티들의 롤모델 ‘제인 구달’ 
  
 20여 년 전 돌연 자신의 모든 업적과 개인적인 삶을 포기하고 지구 환경보호에 뛰어든 제인 구달의 열정과 용기, 그리고 그녀를 지지하는 이들이 들려주는 가슴 뜨거운 이야기를 담은 열정 다큐 <제인 구달>. 동물 보호와 환경 운동의 상징적인 아이콘 ‘제인 구달’은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다. 특히 안젤리나 졸리, 이효리 등 평소 동물과 환경에 관심이 많은 에코브리티들의 롤모델이자 멘토로 손꼽혀 오며 ‘스타들의 스타’로 불리기도 한다. 환경과 인권에 대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할리우드 배우 안젤리나 졸리는 제인 구달에 대해 “직접 뵌 건 몇 년 전 올림픽에서 유엔난민기구 일로 만났을 때지만, 책을 읽어서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늘 내게 영감이 되는 분이고 내 삶에 대한 생각이나 태도를 형성해 가는 것에 도움이 되는 분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예상대로거나 실망하기 일쑤인데 이분은 처음 본 순간 반해버렸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유기견 보호에 앞장서고 있는 가수 이효리는 ‘제인 구달’을 만나기 위해 직접 뉴욕으로 가 그녀를 인터뷰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당시 “정말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1년 전 동물 보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가장 처음 읽은 책이 제인 구달 선생님 책이었다. 선생님도 처음에는 동물 보호로 시작한 게 아니라 동물 연구를 하셨다. 그러다가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의 좋지 않은 상황을 알게 되면서 보호 활동을 시작한 거다. 내게는 정말 멘토 같은 분이기 때문에 너무 만나보고 싶었다”(2011년 싱글즈 12월호 중)고 벅찬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피어스 브로스넌 또한 영화 <제인 구달>을 통해 그녀의 팬임을 자처하며 “그녀는 스타다. 그녀는 자신의 얘기를 잘 전달하는 사람이며 청중에게 마법을 거는 방법을 안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평소 가축 도살과 육식을 반대하는 주장을 펼치는 나탈리 포트먼은 인터뷰를 통해 “딱 한 명을 찝어 말하긴 힘들지만 닮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현명함과 강함을 동시에 지닌 제인 구달을 존경한다”고 말했고, 제65회 베니스영화제 인류애상 상금을 탄자니아 제인 구달 연구소에 전부 기부했다. 이외에도 카메론 디아즈 역시 “그녀는 이 지구가 얼마나 작고 아름다운지 보여줬고 또 얼마나 쉽게 다칠 수 있는지 알려준 사람이다”라고 밝히며 그녀를 지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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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안고 있는 제인 구달과 밥을 먹여주는 그녀의 남편

 “나는 세계가 안전해졌을 때에만 은퇴할 수 있다” 
 23살에 아프리카 케냐로 떠난 소녀! 
 그녀가 당신의 삶에 던지는 강렬한 메시지! 
  
 10살 때부터 아프리카에 가서 동물들과 살며 책을 쓰겠다는 꿈을 꿨던 제인 구달은 불과 23살의 나이에 가족, 친구들과 헤어져 케냐로 떠났다. 그리고 그 여정은 50년이 넘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모두가 그녀에게 실현 가능한 꿈을 꾸라고 조언할 때, 그녀의 어머니는 ‘간절한 마음으로 노력하고 기회를 잡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 길이 생길 것’이라고 그녀를 응원했다. 학위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연필, 노트, 열정만 가지고 침팬지 연구를 시작한 그녀는 지금 이 시대 가장 유명한 동물학자이자 세계적인 환경운동가가 되었고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환경 파괴에 대해 전세계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말, 그녀는 자연 보호와 환경 문제에 스스로를 헌신하기 위해 자신의 과학적 업적 조차도 포기하고 1년에 300일 이상을 세계 곳곳을 다니며 강연과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사람들이 지속 가능하고 환경 친화적인 삶을 선택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에 깊은 확신을 가진 그녀는 너무 늦기 전에 다음 세대를 위해, 환경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 최근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세계에는 친환경 열풍이 불고 있다. 천, 재활용 소재를 사용한 에코백,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화장품을 사용하는 에코뷰티, 폐가전 재활용을 통한 업사이클링(Upgraid+recycling)등 환경과 나눔을 생각하는 소비가 주목 받고 있는 것은 물론, 단순한 소비에 그치지 않고 환경보호에 앞장서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영화 <제인 구달>은 ‘제인 구달’이 살아온 발자취를 묵묵히 따라가며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동물 그리고 환경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그녀의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물론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고 있었던 환경에 대한 경각심 또한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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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구달의 옷을 들춰보는 침팬지


 - 세기의 아이콘, 영화화의 시작 
  
 영화 <제인 구달>은 1990년, 로렌츠 크나우어 감독이 뉴욕에서 처음 제인 구달을 만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제인 구달을 처음 만난 순간 ‘이렇게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지만 영화 <제인 구달>이 탄생하기 까지는 15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다. 이전까지 수많은 할리우드 프로듀서들이 그녀의 삶을 영화로 만들고 싶어했지만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후 제인 구달은 독일에 방문했을 당시 로렌츠 크나우어 감독에게 영화를 촬영하도록 허락했다. 결국 2007년 가을, 프로덕션에 첫 단계가 시작될 수 있었고 그는 몇 주 동안 아무런 장비 없이 카메라만 들고 제인 구달의 강연을 촬영하며 영화를 준비했다. 2009년 1월, <제인 구달>의 두 번째 촬영이 탄자니아에서 이뤄졌다. 촬영은 1월 내내 곰베에 있는 난민 캠프에서 진행되었다. 그 후에는 제인과 그녀의 동생 주디가 가끔씩 가던 부모님의 집이 있는 버몬트에서 진행되었는데, 그곳은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공개되지 않았던 그녀의 사적인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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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제인구달

 - 제인 구달과 안젤리나 졸리 
  
 <제인 구달>의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제작진은 미국에서 제인 구달 강연 시리즈를 함께 담아냈고, 그때 UN 평화대사 동료인 안젤리나 졸리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로렌츠 크나우어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제인 구달을 직접 뵌 건 몇 년 전 UN난민기구 일로 만났을 때지만, 책을 읽어서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늘 내게 영감이 되는 분이고, 삶에 대한 나의 생각이나 태도를 형성해가는 것에 늘 도움이 되는 분”이라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제인 구달의 경험 그리고 현명함과 에너지에 압도적으로 매료되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안젤리나 졸리는 캄보디아, 아프가니스탄 등 난민지역을 찾아가 그들의 실상을 알리고자 기록했던 일지들을 모아서 책([아주 특별한 여행])을 내기도 했으며 지속적으로 동물, 환경보호, 그리고 인권에 대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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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를 바라보고 있는 제인 구달

 - 아무도 몰랐던 그녀의 이야기 
  
 <제인 구달> 제작진은 오스트리아를 거쳐 영화의 마무리 부분 촬영을 위해 제인 구달과 함께 탄자니아로 떠나게 된다. 탄자니아에서 로렌츠 크나우어 감독은 제인의 아들 ‘그럽’과의 인터뷰도 진행할 수 있었는데, 제인 구달이 탄자니아에 대해 알게 된 이유가 바로 아들 ‘그럽’ 때문이라고 한다. 긴 세월 동안 자연 그대로 남아있는 탄자니아는 수많은 동물들이 서식하는 곳인 만큼 몇 년 동안 수렵 꾼들이 사냥 허가를 요구해온 곳이기도 하다. 영화 촬영이 막바지를 향해갈 때 가장 중요한 제인 구달의 인터뷰 촬영은 버몬트의 집에서 며칠 동안 진행됐고, 제작진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제인 구달의 곰베에서의 젊은 시절이 담긴 8mm 촬영본도 얻게 되었다. 로렌츠 크나우어 감독은 영화 <제인 구달>이 단지 유명한 동물학자로서의 그녀의 삶을 또다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지구를 소중하게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한 ‘제인 구달’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자 했다. 침팬지의 친구로 불리는 제인 구달은 자신의 인생에서 1986년을 터닝포인트로 언급하는데 그때는 그녀가 ‘연구가’에서 ‘행동가’가 된 때였다. 그녀는 마지막 인터뷰를 통해 동물과 환경에 대한 자신의 관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관객들은 제인 구달이 카메라를 마주하고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의 삶을 한층 더 깊숙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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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서 인터뷰 중인 제인 구달

 - 제인의 삶을 아우르는 음악 
  
 로렌츠 크나우어 감독은 음악을 통해 아름다운 자연 풍광은 물론 동물, 자연 그리고 인간이 공존하는 삶을 위해 헌신한 제인 구달의 모습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는 수많은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한 독일 뮤지션 볼프강 네쳐(Wolfgang Netzer)와 함께 작업하게 되었고, 영화 <제인 구달>의 타이틀 곡인 ‘Walk lightly on the World’는 영화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가수 케이티 멜루아(Katie Melua)와의 협업 또한 진행되었다. 로렌츠 크나우어 감독은 2009년 여름에 멜루아와 제인 구달의 만남을 주선했고, 두 사람의 고무적인 만남 이후 케이티 멜루아는 영화 <제인 구달>을 위해 ‘Thank you, Stars’라는 아름다운 곡을 작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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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팬지와 눈을 맞추고 소통하는 제인 구달

 

1960.7 탄자니아 야생 생태의 침팬지 사회로 첫 발을 내딛다

안내인은 계속해서 그 영국인 손님 두 명을 흘끔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지금 탕가니카호수 인근의 자연보호구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침팬지 연구를 하러 왔다는 그들은 행색부터 어딘가 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두 사람 모두 여성이라는 것부터가 그랬다. 실제 연구자는 그 중 젊은 쪽이었는데, 기껏해야 나이가 스물대여섯 밖에는 안 된 처녀였다.

더 나이 많은 쪽은 그녀의 어머니라고 했다. 젊은 백인 여성 혼자서 오지에 들어가는 것을 탐탁잖게 생각한 정부를 안심시키기 위해 따라온 보호자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건 좀 아니라고 안내인은 생각했다. 저 두 사람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기껏해야 몇 주나 버티면 다행이겠지 하고 그는 코웃음 쳤다.

수상쩍은 영국인 모녀, 아프리카의 오지에 도착하다

이 수상쩍은 영국인 모녀가 곰비 침팬지 보호구역에 도착한 것은 1960년 7월 16일의 일이었다. 탕가니카(오늘날의 탄자니아)에 입국한 것은 꽤 오래 전이었지만, 때마침 인접국인 벨기에령 콩고에서 식민 통치를 타도하려는 민중 봉기가 일어나 피난민들이 국경 너머로 몰려오자, 탕가니카 정부 측에서 그 지역의 접근을 완전 차단한 까닭이었다. 보호구역에 도착한 뒤에도 모녀는 계속해서 의혹의 눈길에 시달려야 했다. 현지인은 백인 여자들이 원숭이를 보러 왔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고, 아마도 정부나 외국의 첩자이리라 넘겨짚었다. 몇 달 뒤에 어머니 쪽이 먼저 귀국하자, 현지인과 안내인의 예측은 마치 들어맞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아무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사실은, 제인 구달이란 이름의 그 젊은 여성이 이후 10여 년 넘게 그곳에 머무르며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사실들을 발견하리라는 것이었다.

고생물학자 루이스 리키와의 운명적 만남

제인 구달은 1934년 4월 3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동물을 무척 좋아해 지렁이를 침대 위에 올려놓는가 하면, 닭이 알 낳는 장면을 보기 위해다섯 시간이나 닭장 안에서 기다리다 가족들이 경찰에 실종 신고하는 소동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그녀는 아프리카 여행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았다. 대학에 가는 대신 비서학교에 진학한 것도 “비서가 되면 세계 각지를 여행할 기회가 더 많아질 것”이라는 어머니의 충고 때문이었다. 이후 병원과 영화사 등에서 일하다가, 1956년에 옛 친구의 권유로 아프리카의 케냐를 여행한 것이 그녀의 일생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

케냐 여행 중에 제인은 나이로비의 자연사박물관장 루이스 리키(1903~1972)를 만나 그의 개인비서로 취직한다. 저명한 고고학자 루이스는 영국인 선교사의 아들로 케냐에서 태어나, 키쿠유 족과 함께 생활하고 성인식을 거쳤을 정도로 그곳의 말과 문화에 정통했다. 뛰어난 직관력과 쇼맨십을 지니고 학계의 인습과 체면에 굴복하지 않았던 이단아인 루이스는 아내인 메리 리키(1913~1996), 아들인 리처드 리키(1944년생)와 함께 케냐의 올두바이 협곡에서 고인류의 화석을 발굴해 명성을 얻었다.

당시 루이스는 현존하는 생물 가운데 인류와 가장 가까운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등의 대형 유인원에 관한 현장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동물들을 연구함으로써 선사시대 인류의 행동 양식에 대해 약간이나마 힌트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까닭이었다. 제인이 이 연구를 해보겠다고 자원하자, 루이스는 자신의 연줄을 총동원해서 자금 지원에 나섰다. 주위에서는 학력도 경험도 없는 영국인 처녀가 혼자서 밀림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어이없어 했지만, 루이스는 주위의 우려를 일축하고 물심양면으로 제인을 후원했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침팬지의 육식 행위와 도구 사용

1974년 남편 휴고의 카메라 앞에 선 제인 구달

제인 구달 이전에도 침팬지를 연구한 학자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남성이었으며, 또한 자연 상태에서는 수개월 정도의 단기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곰비에 도착한 지 5개월 만에 어머니가 영국으로 돌아가자, 제인은 혼자 밀림에 남아 매일같이 산을 오르며 침팬지들을 찾아 다녔다. 관찰이 시작되고 처음 얼마 동안은 침팬지를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제인은 일부러 언덕 위에 앉아서 침팬지들이 자기 모습에 익숙해지게 했고,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침팬지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털을 골라주는 등의 신체 접촉까지도 성공했다.

제인은 침팬지에게 데이비드, 골리앗, 맥그리거, 플로 등의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이는 당시 학계에서 금기로 여겨지던 행위여서 거센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동물에 대한 관찰 연구에 약간의 감정이입이 불가피함을 인정한 이런 조치는 동물행동학의 원조 격인 콘라트 로렌츠(1903~1989)의 방법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제인의 연구는 자연환경을 벗어나 실험실의 인공환경에 갇혀 있던 그 분야의 연구를 다시 자연으로 불러낸 셈이었다. 그러나 주위의 평가는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금발에 백인에 미인인 그녀의 외모, 다리가 훤히 드러난 반바지 차림의 사진, 하다못해 ‘타잔’과 ‘치타’를 연상시키는 ‘제인’이란 이름까지도 종종 험담의 대상이 됐다.

제인 구달의 초기 연구에서 가장 획기적이었던 발견 두 가지는 침팬지가 사냥과 육식을 즐긴다는 사실, 그리고 침팬지가 연한 나뭇가지를 구멍에 쑤셔 넣는 방법으로 흰개미를 잡아먹는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두 번째 발견은 도구의 제작 및 사용은 오로지 인간만이 지닌 능력이라는 통념이 지배적이던 시절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소식을 들은 루이스 리키는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을 다시 정의하던가, 도구를 다시 정의하던가, 아니면 침팬지를 인간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 발견 직후에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는 자금 지원과 아울러 네덜란드 출신의 사진작가 휴고 반 라윅을 파견해 사진 및 영화를 촬영했다. 이 과정에서 제인과 휴고는 사랑에 빠져 1964년에 결혼했고, 짧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곰비로 돌아가 연구를 재개한다. 제인은 1967년에 아들을 낳고 양육에 신경 쓰며 현장 연구로부터 다소간 멀어진다. 오지에서의 침팬지 연구로 강인함의 상징이 되다시피 한 그녀였지만, 의외로 어머니라는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을 강조한 까닭에 페미니즘 진영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동물의 세계에서 페미니즘을 찾으려 한다면 침팬지는 거기 적절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이 그녀의 솔직한 설명이었다.

침팬지 사회의 동족살해

제인은 1965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동물행동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대학에 다닌 적이 없었던 제인에게 베풀어진 이런 특혜는, 앞으로의 활동을 위해서도 그 분야의 학위를 받아두는 것이 필수라는 루이스의 주선 덕분이었다. 제인은 1971~75년까지 스탠포드 대학의 외래 교수로 재직한다. 성공의 이면에서 그녀의 사생활은 긴장의 연속이었고, 아내의 명성을 영 부담스러워 하던 휴고와는 1974년에 이혼한다. 이듬해 데릭 브라이슨과 결혼했는데, 그는 영국 출신으로 탄자니아 정관계에 두루 인맥을 구축한 실력자여서 5년 후 갑작스레 사망하기 전까지 제인의 침팬지 연구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제인의 연구는 1975년에 큰 위기를 맞이한다. 연구원 네 명이 탕가니카 호수를 건너온 자이레(콩고)의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 직후 탄자니아 정부는 곰비에서 외국인을 모두 철수시키는 조치를 내렸고, 제인 구달조차도 향후 지금까지 그곳에 거주하지 못하고 매년 몇 주 동안만 체류가 허락되었으며, 부재중에는 탄자니아인 연구원들이 업무를 대신 수행했다. 납치범들과의 협상 과정에서 탄자니아 정부나 연구소 측이 일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 외부에 비치는 바람에, 제인은 한동안 연구를 위해 사건을 은폐 또는 축소하려 했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물론 본인은 납치 사실을 뒤늦게야 전해 들었다고 해명했지만).

같은 해 또 다른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침팬지 사이에서 ‘동족살해’의 사례가 처음으로 관찰됐던 것이다. 이때 나타난 증거를 본 제인은 침팬지의 미덕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을 고치게 되었다. 침팬지도 충분히 잔인해질 수 있으며, 인간 못지않게 어두운 본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침팬지의 잔인성에 대한 그녀의 보고는 많은 사람들의 반감과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일각에서는 이런 증거가 자칫 폭력과 살인을 옹호하는 근거로 오용될 수 있으리라고 지적했다. 제인도 그런 위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정치적인 고려 때문에 어떤 사실을 무시하거나 축소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침팬지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우리 인간을 닮았다.” 그녀의 말이다.

동물보호운동과 침팬지의 권익 향상을 위한 노력

20세기 초만 해도 아프리카의 침팬지는 200만 마리에 달했지만, 반세기 후에는 15만 마리로 수가 급감했다. 원인은 바로 인간이었다. 인구 증가로 밀림이 사라지고 개간지로 변했다. 곰비 인근만 해도 제인이 처음 봤을 때는 울창한 밀림이었지만, 오늘날 국립공원 경계선 밖으로는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무지로 변했다. 침팬지는 실험용 및 애완용으로 비싼 값에 수출되기도 했다. 밀렵꾼은 보통 어미를 쏴 죽이고 새끼를 챙기는 방법을 선호한다. 이 경우 혼자 남은 새끼의 생존 확률은 극히 낮으므로, 불법 거래되는 침팬지 새끼 한 마리는 다른 침팬지 여러 마리의 희생을 전제한 셈이라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백발의 할머니가 되었어도 여전히 동물보호운동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는 제인 구달

제인 구달은 1986년 말까지만 해도 동물보호운동의 일선에 나서지 않은 것 때문에 지인 및 운동가들로부터 오히려 오해와 비난을 받았다. 물론 동물을 무의미하게 학대하고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의 연구 대상인 곰비의 침팬지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 이후로는 전 세계를 돌며 자연보호에 관련된 강연을 하고 있으며, 각지의 실험실이며 동물원을 방문해 그곳에 수용된 침팬지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뿌리와 새싹’이라는 아동 대상 환경보호 운동을 제창하여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아울러 제인은 채식주의자이긴 하지만 비인간적인 공장식 사육에만 반대할 뿐, 약육강식이 자연스러운 행위임은 인정한다. 그녀는 침팬지가 아프리카 현지인에게는 전통 음식 문화의 일부분임을 긍정하는 한편, 다른 동물, 심지어 자기가 낳은 아기조차도 침팬지에겐 ‘먹잇감’으로 여겨질 수 있음을 시인했다(따라서 그녀는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종종 우리에 넣어 두곤 했다). 일찍이 한국을 찾았을 때 개고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개는 똑똑하니까 먹지 말자고 주장한다면, 돼지 역시 그만큼은 똑똑하므로 먹지 말아야 한다. 어디까지나 문화적 차이라고 생각한다”는 요지의 답변을 내놓은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었으리라.

리키의 세 딸들:제인구달, 다이언 포시, 비루테 갈디카스

고고학자 루이스 리키는 제인 구달 이후에 다이언 포시(1932~1985)와 비루테 갈디카스(1946년생)라는 또 다른 여성들에게 고릴라와 오랑우탄 연구를 맡겼다. 남성보다는 여성이 관찰력이나 인내심이나 집요함에서 더 월등하다고 믿은 까닭이었다. ‘리키의 세 딸들’은 각자 담당한 유인원처럼 매우 대조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자칫 비극으로 끝나기 쉬운 위험한 길을 택했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난 다이언의 경우, 1967년부터 20년 가까이 멸종위기 종인 마운틴고릴라를 연구하여 명성을 얻었지만, 이후 고릴라 보호에 앞장서는 과정에서 인근 주민 및 밀렵꾼들과 갈등을 빚다가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제인과 비루테 역시 각자가 사랑하는 유인원을 보호하기 위해 적잖은 희생과 오해와 싸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세 사람이 각자의 연구 대상에 지나치게 감정이입한 나머지 건전한 판단력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환경 위기에 대한 대중의 인식보다도 반세기 앞서 갖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생명의 소중함을 세상에 알린 이들의 노고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산만 보면 터널을 뚫으려 하고, 강만 보면 운하를 파려 하고, 땅만 보면 아파트를 세우려 한다. 하지만 때로는 거기 사는 침팬지 한 마리, 도롱뇽 한 마리, 풀 한 포기가 소중하다는 것을 세 사람은 오랜 세월에 걸친 각자의 행동으로, 심지어 죽음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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