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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광시모음 32편/그도세상
11 그도세상김용호 2021.01.25 00:44:36
조회 69 댓글 1 신고

이영광시모음 32편
☆★☆★☆★☆★☆★☆★☆★☆★☆★☆★☆★☆★
《1》
검은 봄

이영광

나는 칼이요 분열이요 전쟁이다
사랑과 통합과 연대의
적이다
나는 찌르고 파괴하고 흩날린다
나는 가장 작고 가장 크며
가장 보이지 않는다
변함 없이 따사롭다

피 흘리는 가슴이요 찢어지는 아픔이며
나를 모르는 격투다
나는 가르고 나누고 뜯는다
숨 막히는 사이와
절벽 같은 거리를 짓고
상처와 이별을 생성하며
가장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처음처럼 나타난다
나는 병이고 약이며 고통이다
자연이요 문명이요 생명이다
나는 죽이고 살리고 허물며
세운다 규범 없는 세계를,
세계 없는 규범을 세우고,
허물고 살리며 죽인다

나는 폐허이고 천국이다
나는 지옥이며 평화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또한 코로나의 이름으로,
나는 따사로운 저주이다
이름 없는 모든 것으로
이름 아닌 모든 것으로

출처 : 시 전문 계간 《발견》 202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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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영광


먼 곳에 슬픈 일 있어 힘없는
원주 토지문화관의 저녁이다
속 채우러 왔다, 슬리퍼 끌고

해장국이 나오길 기다리며 신문을 뒤적이다
누군가의 소식을 읽고,
아? 이 사람 아직 살아 있었구나!
놀라고 다행스러워하는 마음이 된다

허기가 힘을 내는 것이 우습다가
문득 또, 누군가 내 소식을 우연히 듣고
아? 그 사람 아직 살아 있었구나,
놀라길 바라는 실없는 마음이 돼본다

다행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만한 용기는 없다
허기는 아무래도 쓸쓸한 힘,
뭘 바라지 못하는 순간이 좋다

밥보다도 더 자주 먹는 이
겁에 의해,
오늘도 무사하지 않았느냐고

무사한 사람,
무사한 사람,
중얼거렸다
겁도 없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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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사목 지대

이영광

죽은 나무들이 씽씽한 바람소릴 낸다
죽음이란 다시 죽지 않는 것
서서 쓰러진 그 자리에서 새로이
수십 년씩 살아가고 있었다

사라져 가고
숨져 가며
나아가고 있었다

유지를 받들 듯
산 나무들이 죽은 나무들을 인정해 주고 있었다

정상 부근에서는 생사의 양상이 바뀌어
고사목들의 희고 검은 자태가 대세를 이룬 가운데
슬하엔 키 작은 산 나무들 젖먹이처럼 맺혔으니

죽은 나무들도 산 나무들을 깊이
인정해 주고 있었다

나는 높고 외로운 곳이라면 경배해야 할 뜨거운 이유가 있지만
구름 낀 생사의 혼합림에는
지워 없앨 경계도 캄캄한 일도양단도 없다

판도는 변해도 생사는
상봉에서도 쉼 없이 상봉 중인 것
여기까지가 삶인 것

죽지 않는 몸을 다시 받아서도 더 오를 수 없는
이곳 너머의 곳, 저 영구 동천에 대하여
내가 더 이상 네 숨결을 만져 너를 알 수 없는 곳에 대하여
무슨 신앙 무슨 뿌리 깊은 의혹이 있으랴

절벽에서 돌아보면
올라오던 추운 길 어느 결에 다 지우는 눈보라
굽이치는 능선 너머 숨죽인 세상보다 더 깊은 신비가 있으랴

출처 : 노작문학상 수상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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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 시인

이영광

누가 써 보내라 하지 않아도
강제로 쓴다
한 해에 두세 군데 청탁이 오기 전에
겁을 집어먹고 벌써
쓰고 있다

무엇이 강제하는지 모르고
집에서 밥집에서 길에서
멍청하게 멈춰 강제로,
억지로 쓴다
강제로 쓴다

밥은 안 되지만 밥벌이하듯 쓴다
돈은 안 되지만 돈의 노예처럼 쓴다
이름은 없지만 정말
무명이 되어 쓴다
무명으로 쓴다

주인 없는 새 세상에 절망에 통곡하던
해방 노비들처럼
누가 뛰어 들어와 선 줄도 모르고
정성스레 혼자 노래하는 아이처럼

사랑으로 쓴다
사랑의 강제로 쓴다
그게 사랑인 줄 알고 쓴다

그게 사랑인 줄도 모르고
그게 사랑인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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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적

이영광

중학생이 된 조카가 교과서를 들고 와서
이건 뭐고
저건 뭐냐고 묻는다
대답을 못하겠다

살아보니 나 같은 건 한없이 정신이 박약해지고
사람을 멀리하고,
죽어가는 짐승처럼 사납더라
꿈은 사라지고
믿지 않고,
아무 몸이나 안을 수 있더라

교과서 같은
경전 같은
기적은 없더라

이렇게 분명히 정리된 기적을
여러권 가지고 있으니
조카여, 너는 행복한 시절이다
지난달에도 일등을 했다 하니 너는
먼 훗날 꼴찌로 졸업하겠구나

재작년까지도 싼타는 있다고
반 아이들 전부와 맞섰던
조카여, 진심을 말하자면, 네가
자빠지고 엎어지고 무르팍이 깨어지면서도
꿋꿋이 교과서 속을 걸어가서
끝내 기적이 되었으면 한다
졸업 같은 거 하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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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노안

이영광

늦은 술자리에는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말이 된다고
작당해서 우기는 사람들.
말도 안 된다고,
못 참고 한편이 되어
대드는 사람들.

아침 산책길에는
똑같은 면티에 반바지를 갖춰 입고,
지역 광고방송 추리닝 모델들처럼 커플들이
손 붙잡고 걸어간다.

다들 서로 좀 들락거리는 중이라는 거다
한마음이라는 거다

아무리 봐도 나는,
두 사람이다
두 사람
두 사람이었는데,
최근 나에게는 노안이 왔다.
눈 비비고 보면,

머리가 둘
눈이 넷
입이 둘
팔다리가 여덟이나 달린 생면부지의
한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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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높새바람 같이는

이영광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내겐 지금 높새바람 같이는 잘 걷지 못하는 몸이 하나 있고,
높새바람 같이는 살아지지 않는 마음이 하나 있고
문질러도 피 흐르지 않는 생이 하나 있네
이것은 재가 되어 가는 파국의 용사들
여전히 전장에 버려진 짐승 같은 진심들
당신은 끝내 치유되지 않고
내 안에서 꼿꼿이 죽어가지만,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자꾸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
《8》
독방

이영광

혼자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나는 믿었지만
행복 속에 안녕이 없네

나는야 뭉게구름 같은 숲 가녘에
안내인마냥 외따로 선
키 큰 소나무 한 그루 사랑했지만
그 나무 오징어 다리 같은 뿌리 내놓고 길게 쓰러졌네

혼자 있는 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
한마디도 하지 않는 자
무엇이든 저지르고 마는 자이네

그의 몸은 그의 몸 이기지 못해
일어나지 않는 몸
기필코 자기를 해치는 몸이네

이 독방에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독방
현관문 열고
방문 열고 들어서면
더 들어갈 데가 없는 곳에
그러나 더 열고 들어가야 할 문 하나가 어디엔가
반드시 숨어 있을 것 같은 곳에

쓰러지지 않고
침묵하지 않고
기어다니지 않아도 되는
더 단단한 독방 하나, 나는 믿었지만

그 꿈 같은 감옥
불 켜면 빛 속으로 사라지고
지금, 타는 듯한 벌판에서 눈 감는 사람은
또 다시 문 밖에 누워 잠드는 사람이네

출처 : 노작문학상 수상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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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돌아가는 것

이영광

요 몇 해,
쉬 동물이 되곤 했습니다

작은 슬픔에도 연두부처럼
무너져 내려서,
인간이란 걸 지키기 어려웠어요

당신은 쉽습니까
그렇게 괴로이,
웃으시면서

요 몇 해,
자꾸 동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눈물이라는 동물
동물이라는 눈물

나는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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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두 악마

이영광

아침에 눈뜨면
어떻게 살까
생각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아침에 눈 감으면
어떻게 죽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내가 아니다
가택 침입한 두 악마다
가슴을 타고 앉아
사납게 싸운다
악마를 물리치고 얻는
매일매일
원수를 사랑하고 얻는
매일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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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두부

이영광

두부는 희고 무르고
모가 나 있다
두부가 되기 위해서도
칼날을 배로 가르고 나와야 한다

아무것도 깰 줄 모르는
두부로 살기 위해서도
열두 모서리,
여덟 뿔이 필요하다

이기기 위해,
깨지지 않기 위해 사납게 모 나는 두부도 있고
이기지 않으려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모질게
모 나는 두부도 있다

두부같이 무른 나도
두부처럼 날카롭게 각 잡고
턱밑까지 넥타이를 졸라매고
어제 그놈을 또 만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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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무인도

이영광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것 같을 때면 어디
섬으로 가고 싶다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결별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떻게 죄짓고 어떻게 벌받아야 하는지
힘없이 알 것 같을 때는 어디든
무인도로 가고 싶다
가서, 무인도의 밤 무인도의 감옥을,
그 망망대해를 수혈받고 싶다
어떻게 망가지고 어떻게 견디고 안녕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그만 살아야 하는지
캄캄히 다 알아버린 것 같은 밤이면 반드시,
그 절해도에 가고 싶다
가서, 모든 기정사실들을 포기하고 한 백 년
징역 살고 싶다
돌이 되는 시간으로 절반을 살고
시간이 되는 돌로 절반을 살면,
다시는 여기 오지 말거라
머릿속 메모리 칩을 그 천국에 압수당하고
만기 출소해서
이 신기한 지옥으로, 처음 보는 곳으로
두리번두리번 또 건너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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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이영광

가지 말아야 했던 곳
범접해선 안 되었던 숱한 내부들
사람의 집 사랑의 집 세월의 집
더렵혀진 발길이 함부로 밟고 들어가
지나보면 다 바깥이었다.

날 허락하지 않는 어떤 내부가 있다는 사실.
그러므로 한번도 받아들여진 적 없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서 나는 지금
무엇보다도, 그대의 텅빈 바깥에 있다.

가을 바람 은행잎의 비 맞으며
더이상 들어갈 수없는 곳에 닿아서야
그곳에 단정히 여민 문이 있었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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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물불

이영광

1억5천만km를 날아온 불도 엄연한 불인데
햇빛은 강물에 닿아도 꺼지질 않네
물의 속살에 젖자 활활 더 잘 타네
물이 키운 듯 불이 키운 듯 버드나무 그늘에 기대어
나는 불인 듯 물인 듯도 한 한 사랑을 침울히 생각하는데
그 사랑을 다음 생까지 운구할 길 찾고 있는데
빨간 알몸을 내놓고
아이들은 한나절 물 속에서 마음껏 불타네
누구도 갑자기 사라지지 않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것이
저렇게 미치는 것이 옳겠지
저 물결 다 놓아 보내주고도 여전한 수량
태우고 적시면서도 뜯어말릴 수 없는 한 몸이라면
애써 물불을 가려 무엇하랴
저 찬란 아득히 흘러가서도 한사코 찬란 이라면
빠져 죽는 타서 죽는
물불을 가려 무엇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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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방심

이영광

그는 평생 한 회사를 다녔고,
자식 셋을 길렀고
돈놀이를 했다
바람피우지 않았고
피워도 들키지 않았다
방심하지 않았다
아내 먼저 보내고 이태째
혼자 사는 칠십대다
낮술을 몇 번이나 나누었는데
뭐 하는 분이오, 묻는 늙은이다
치매는 문득 찾아왔고
자식들은 서서히 뜸해졌지만,
한번 오면 안 가는 것이 있다
그는 이제 정말 방심하지 않는다
치매가 심해지고 정신이 돌아온다
입 벌리고 먼 하늘을 보며, 정신이
머리 아프게, 점점 정신 사납게,
돌아온다 그는 방심이 되지
않는다 현관에 나앉아 고개를 꼬고,
해가 떠나면 구름이 다가올 뿐인
먼 하늘에 꽂혀 있다
꽃 지자 잎 내미는 산 벚나무 그늘 밑
후미진 꽃들에 들려 있다
그는 자꾸 정신이 든다
평생의 방심이 무방비로 지워진다
한번 오면 안 가는 것이 있다
저녁에 퇴근하는 내게 또 담배를 빌리며
어제 왔던 자식들의 안부를 물을 것이다
뭐 하는 분이오? 침을 닦으며,
결코 방심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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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봄날

이영광

안경을 잊어버리고 출근하였다
집으로 돌아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간밤 취해서 부딪혔던 골목 귀퉁이가
각(角)을 잃고 편안히 졸고 있는 걸보고 발길을 돌렸다
길이 뿌옇게 흐렸으므로 무단횡단도 하지 않았다
나의 약시가 담 모서리의 적의를 용서한 덕분일까
새 학기 들어 처음 흡족하게 강의를 마쳤다
미운 놈 고운 놈 제각각이던
학생들도 모두 둥글둥글 예뻐 보이고
오늘 따라 귀를 쫑긋 세우고 열중하는 것 같았다
담배를 피워 물고 창 밖을 내다보니
황사 며칠, 서울도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
흐릿해진 풍경 어딘가에 봄 내음이 스며
조용조용 연둣빛으로 옮겨내는 중이다
나는 세상을 너무 자세히 보려 했던 모양이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어딘 가로 번져가는 중이기에
수묵 같은 흔적을 남기는 것이기에
안경 도수가 높아갈수록 모든 것은 자취를 감추고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어두웠던 눈에 봄이 처음
연둣빛 투명한 안경을 씌워준 날, 봄날
☆★☆★☆★☆★☆★☆★☆★☆★☆★☆★☆★☆★
《17》
비만한 단식

이영광

사랑해도 미치지 않았다
죽지도 않았다
술을 마셨다
삼십 년 전에

물을 마신다, 삼십 년 뒤의
삼십 년 전에
알약도

사랑을 참아도
미치지 않는다
죽지도 않는다

삼십 년은 아귀처럼
아기처럼
배고프다
참는 사랑도

사랑,
그리움엔 피가 없지만
핏속에도 그리움은 없어요
사랑은
생수를 마시며

누더기이고,
괴롭다 괴롭다 해도
목숨이 제일 익숙합니다

죽지 않는 것이
제일 편합니다
☆★☆★☆★☆★☆★☆★☆★☆★☆★☆★☆★☆★
《18》
사실은

이영광

비 오는 날 찻집에 혼자 앉아 있어봐도
별로 쓸쓸하지도 않다는 것
쓸쓸한 척을 들킬 진짜 쓸쓸이 없다는 것
책을 읽고 있지만 사실은
열중하지도 않는다는 것
술집으로 옮겨 낮술을 마셔보지만
환자가 오만상 쓰며 약을 먹듯
술을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것
글을 쓴다지만 사실은 꼭 할 말이 있지도
않다는 것, 사실은 꼭 할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
오지도 않는다는 것, 하루 종일
섹스 생각 돈 생각만 나기도 한다는 것
글쟁이도 선생도 아니라는 것
무언지 몰라 잠시 이것들이라는 것
가장 확실한 살아 있다는 느낌이 사실은,
살아 있지 않다는 느낌이라는 것
거의 살아 있다는 것
물 속에서 오줌을 누듯
빗속에서 눈물을 훔치듯
희망이란 좀체 입 밖에 내질 않는데도
아픈 시간들은 그걸 온통 썩게 하고
썩은 시간들은 다시 그걸 낱낱이 아프게 한다
☆★☆★☆★☆★☆★☆★☆★☆★☆★☆★☆★☆★
《19》
순대

이영광

순대 전문점 가스불 위에서 김 뿜는 순대덩이를
뼈 잃은, 짐승의 생식기 같기도 하고
어린 시절, 뽐뿌로 바람을 넣으면
탱탱하게 부풀어오르던
빵꾸 때운 자전거 튜브 같기도 하다
저 속으로 꿀꿀이죽이 쏟아져 들어가
용적을 늘리고 간과 불알을 키워도
결국 텅 비어 쭈글쭈글한 주름 주머니
아니겠는가 아래를 묶었던 허기가
풀리면 와르르 새버리는 구멍
저 안은 공(空)인가 색(色)인가
금욕처럼 조용한 오후 세시
순대집 아줌마, 고무 다라이에 가득한 내장을
고무장갑으로 주무르고
순대 주세요
저는 허기로 밑을 꽉 조인 구멍이예요,
물론 조금 있으면 또 헤벌어지겠지만요
나는 순대를 소금에 찍어 입에 넣는다
빵꾸난 길다란 순대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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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시인들

이영광

어딘가 아픈 얼굴들을 하고 시인들이 앉아 있다
막 입원한 듯 막 퇴원한 듯 위중해도 보인다
암 투병 중인 여류시인 문병 갔다가 걸어서 연말 술자리에 갔더니
울긋불긋한 선거 현수막이 만장같이 나부끼더니
얼음장 아래 모인 한 됫박의 마른 물고기들처럼
오직 시인들끼리, 시인들이 모여 있다
자리에 앉았는데도 멀리 떠난 얼굴을 한 아픔도 있고
어디든 너무 깊이 들어앉아 칼끝처럼 자기를 잊은 아픔도 있다
면도로 민머리에 예쁜 수건을 쓴 마른 몸이 생각났다
젖과 자궁을 들어내고 젊은 죽음 냄샐 풍기는 몸들이 생각났다
아픈 그녀의 자리는 여기 없고
그녀는 이곳보다 더 춥고 어두운 들판을 걸어가고 있고, 시인들이
이름 부르면 끌려나가야 할 인질들처럼 모여 있다
많은 것을 버렸는데도 아직 더 버릴 게 있다는 얼굴들이다
별로 얻은 게 없는데도 별로 얻을 게 없다는 표정들이다
시인들은 영원히 딴 곳을 보고 있다
무섭게 아프고 무섭게 태연하다
간혹 한눈팔지 않는, 사촌 같은 아픔도 끼여 있는데
병을 흉내내는 것이 더 큰 병임을 알기에
모르는 척 속은 듯 함께 앓아 넘기기도 한다
나는, 여기 머물면서도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 사람들이 좋다
이상(異常)한 것에 정신 없이 끌리는 사람들이 좋다
제가 아픈지 안 아픈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좋다
처음부터 지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좋다
마음 가난과 어지러움은 면허 같은 것이니 길이 보전들 하시되
내년에도 몸이나, 어떻게든 몸 하나만은 잘들 보살피시라고
나는 조등(弔燈)처럼 노랗게 취하며 기원했다
얼음 물고기들이 순한 주둥이를 뻐끔대며 옹송그리는
차디찬 환영이 나무 벽 위로 자꾸 지나갔다
진통제를 꽂고도 시 읽고 시 읽어 달라던 안 아픈 영혼
아직 시집 한 권 낸 적 없는 그녀 생각이 났다

출처 : 노작문학상 수상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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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시체 중

이영광

사랑해도 죽지 않았다
술을 마셨다
30년 전에

지금은 물을 마신다,
30년 뒤의
30년 전에
하얀 알약도

30년은 아귀처럼
배고프다
사랑을 참는 사랑을
참는 사랑을
참는

사랑은 죽지를 않는다
그리움엔 피가 없지만
핏속에도 그리움은 없어요
누더기를 두르고

생수를 마시는
생수를 마시는
시체 연기 중
시체 중

괴롭다 괴롭다 해도
목숨이 제일 익숙합니다
죽지 않는 것이
제일 편합니다

출처 : 시집 《깨끗하게 더러워지지 않는다》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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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외계인이 와야 한다

이영광

콩가루 집안도 싸움 나면 뭉치고
툭탁거리던 아이들도 딴 학교랑 축구하면 함께 응원을 한다
딴 동네 딴 도시 딴 지역과 다툼이 나면
한 동네 한 도시 한 지역이 된다

전라도와 사이가 틀어지면 경상도가 된다
경상도에 맞설 때면 전라도가 된다
북한과 다툴 때는 남한이 되고,
월드컵만 열렸다 하면 아우성치는 대한민국이 된다

그러므로 외계인이 쳐들어와야 한다
성간우주(星間宇宙)를 안마당처럼 누비고 다니는
외계 우주선들의 어마어마한 공습 앞에서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을 것이다
서방과 아랍이 연대할 것이다
아시아 제(諸) 국가들이 단결할 것이다

외계인이 와야 한다
모든 국경이 폐제되고,
기독교도와 무슬림이 형제가 될 것이다
모든 호모사피엔스가 하나가 될 것이다
인간과 사자와 뱀과 바퀴벌레 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스크럼을 짤 것이다

더 큰 적이 나타나고 더 큰 싸움이 나는 수밖에 없나?
외계인이 와야 한다
전 세계 모든 나라가 잿더미가 되지 않을까?
외계인이 와야 한다
전 지구 생명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을까?
외계인이 와야 한다

다른 별들에서, 지구촌을 전율에 빠뜨릴
초호화 축구팀들이 공격해 와야 한다
부처나 공자나 예수보다 더 환상적인
외계 스타플레이어들이 와야 한다
은하계 별들이 두두둥둥! 자웅을 가리는
우주 월드컵이 열려야 한다
☆★☆★☆★☆★☆★☆★☆★☆★☆★☆★☆★☆★
《23》
우물

이영광

우물은,
동네 사람들 얼굴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

우물이 있던 자리
우물이 있는 자리

나는 우물 밑에서 올려다보는 얼굴들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
☆★☆★☆★☆★☆★☆★☆★☆★☆★☆★☆★☆★
《24》
움막

이영광

새는 새 속에서 날고,
강아지도 강아지 속에 들어가 졸고 있다
세상에, 바람은 허공 속에 숨은 채로
돌은 어떻고, 돌 속에 들어가 누워
잘 잔다

할머니는 무덤 가에 할미꽃 예쁘게 피워 올리고
아버지도 영정이 편안하게 웃고 있으니

화(禍) 많고 한 많았지만
할머니 단잠
아버지 웃음

한 많고 화 많아서
할머니 꽃
아버지 그림

숙주가 불안정해 자식 인간은 뒤척인다
들어가려는 듯 나오려는 듯
움막 문을 닫지도 않고,
이불을 걷어찬다
☆★☆★☆★☆★☆★☆★☆★☆★☆★☆★☆★☆★
《25》
의자

이영광

앉아 있는 사람의 몸 아래에
어느새 먼저 와서
앉아 있는 사람

의자는 먼 곳에서 쉼 없는 네 발로
삐걱삐걱 걸어 여기 왔다

의자의 이데아는,
마르고 다정하고 아픈 몸을 한
늙은 신일 것이다
☆★☆★☆★☆★☆★☆★☆★☆★☆★☆★☆★☆★
《26》
제자리

이영광

바다 건너 대륙에서 반세기만에
체포되는 전범처럼,
정신이 든다
심사를 하고 외박하고 비를 맞고,
음악이 나오네
인간은 기진맥진인데 하루도
빠짐없이 삶이 찾아온다
인생 쾌락을 뚝뚝 잘라먹는
코로나 때문이 아니더라도,
무엇이 되기 위해 하는 건 싫어
무엇을 하기 위해서
되는 건 더 싫다
싫은 건 죽지도 않아
멀고 깊은 곳에 넋을 내주고
단지 남은 것으로서,
메마름에 쫄딱 젖고 싶었는데
어두워졌어, 내가 약하니
비 오다가 해 나다가 하는 기후엔
정신도 정신이 없다
오늘은 조시를 쓰고
내일은 축시를 써야 해
나는 별에서 살고 있다는데
빛이 안 보일 때가 많았어
안 보이는 그게 무슨
대수라고, 대수인가, 대수인
모양이어서
어두운 날, 영영 칼이 없고
칼 생각도 없는데도,
빛을 베며 걷는 중이라
굳게 믿었네
하늘 한 점 없는 구름이
앞을 가려서가 아니더라도,
앎은 장님처럼 나아가고
모름은 빛처럼 다가온다
게임이 안 되는 그 게임이
본 게임이어서,
그 빛은 언제나 날 살려두신다
살려내시는 법이 없어
맞으면서 용서하는 사람처럼
제자리에서 부풀고 있다
터지고 있다
버리지 못하는 것이
가지는 것일까
가지지 못하는 것이
사랑일까
그 빛은 날 허그 하지 않고,
내가 지었으니
네가 구하여라
바다 건너 대륙에서 반세기만에
전범을 체포하는 비밀
경찰처럼 늘,
처음처럼,
정신이 나간다

출처 : 계간 《문학과 사회》 (202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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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조금 전 조금 뒤

이영광

돈하고 별 인연 없는 나도 전에 어쩌다
빚 받으러 간 적 있다
조금 전에 이사 갔는데요

아버지 위중하단 전화 받고 내달렸는데
조금 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말했다

나는 조금 전을 이겨본 적이 없다
준비물을 잊어먹고 집에 돌아갔다가
다시 학교로 뛰어가는 아이처럼
땀 흘려, 조금 전에 지각하곤 했다

흉하게 일그러지는 네 우는 얼굴에
지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조금 전에게 지면 늘
조금 뒤가 온다

빚쟁이가 먼 데로 숨었듯이
아버지가 몸밖에 없었듯이
응, 이제 괜찮아, 정말 괜찮아,

태연히 웃는 얼굴,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은
조금 뒤가 온다
☆★☆★☆★☆★☆★☆★☆★☆★☆★☆★☆★☆★
《28》
죽도록

이영광

죽도록 공부해도 죽지 않는다, 라는
학원 광고를 붙이고 달려가는 시내버스
죽도록 굶으면 죽고 죽도록 사랑해도 죽는데,
죽도록 공부하면 정말 죽지 않을까
죽도록 공부해본 인간이나
죽도록 해야 할 공부 같은 건 세상에 없다
저 광고는 결국,
죽음만을 광고하고 있는 거다
죽도록 공부하라는 건
죽으라는 뜻이다
죽도록 공부하는 아이들을 위해
옥상과 욕조와 지하철이 큰 입을 벌리고 있질 않나
공부란 활활 살기 위해 하는 것인데도
자정이 훨씬 넘도록
죽어가는 아이들을 실은 캄캄한 학원버스들이
어둠 속을 질주한다, 죽기 살기로
☆★☆★☆★☆★☆★☆★☆★☆★☆★☆★☆★☆★
《29》
지각

이영광


오래 멀리 찾아간 사람과
건강 얘기를 했다
지나온 나날과 남은 날을,
돈 얘기를 했다 늦게
정신이 들어 이제 바쁘다고
서로 요약해서 말했다
헤어지며 생각하니, 일 얘기
살 얘기만 나누었을 뿐
죽을 얘기를 못했다
죽고 싶을 애기를,
마음을 꺼내지 못했다 마음이
비밀 같고
비리 같았다
하늘땅을 여러 날 걸어
돌아와 생각하니,
그 모든 말들이 걱정에 싸여 있어서
마음 없는 말이 없었다
말 없는 마음이 없었다
내일은 더 바쁠 것이다
이별은 나에게 지각하고
나는 이별의 지각에
지각했을 뿐이었다
☆★☆★☆★☆★☆★☆★☆★☆★☆★☆★☆★☆★
《30》
직선 위에서 떨다

이영광

고운사 가는 길
산철쭉 만발한 벼랑 끝을
외나무다리 하나 건너간다
수정할 수 없는
직선이다

너무 단호하여 나를 꿰뚫었던 길
이 먼 곳까지
꼿꼿이 물러나와
물 불어 계곡 험한 날
더 먼 곳으로 사람을 건네주고 있다
잡목 숲에 긁힌 한 인생을
엎드려 받아주고 있다

문득, 발 밑의 격랑을 보면
두려움 없는 삶도
스스로 떨지 않는 직선도 없었던 것 같다
오늘 아침에도 누군가 이 길을
부들부들 떨면서 지나갔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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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진흙 논에 드리운 백일홍 그림자

이영광

봉선사 범종 소리는
범종을 버리고
절을 버리고
세상 끝 지평선을 무너뜨리고 있는데

사자후는 멀어라
진흙 논에 드리운 백일홍 그림자,
찬물을 벌겋게 데우는
이 세상 군불

홍조를 띄우고 그대 내 곁에서
갱년기(更年期)로 웃을 때
☆★☆★☆★☆★☆★☆★☆★☆★☆★☆★☆★☆★
《32》
현기증

이영광

마흔, 어디선가 누가 지금 나를 완전히
포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고뇌에 찬 결단이기를 빈다
밥 먹다 말고 화장실 갔다 와서
다시 숟가락 집어드는 사람은 지금 제 인생이
너덜너덜해졌다고 깊이 느꼈다, 느꼈을까
내면이란 게 상(傷)하게 되어 있는 거지만 그곳으로
먹는다는 건 안으로 토한다는 것, 근데 왜 멎질 않지
흉터를 몸에 남기고 간 것들조차 믿을 수 없고
머리가 빠진다, 사람 같지 않던 그 독재자처럼
아니 그자와는 아무 관계없이 온 미래일 뿐이다
미래란 늘 난장판이었지만
미래라고 하면 두근거리며 현관에 다가선 발소리가 떠오르지만
내가 노후를 걱정하지 않는 걸 보면
나에게도 분명 노후가 있을 것이다
죽음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쉼 없이 중얼거렸던 자는
무시무시한 방랑과 영웅적인 은둔에 대해
약간 병적인 선호를 가진 자
누가 광인보다 더 진실되겠는가
누가 소외되지 않기 위해 칩거한 자의 말을 듣겠는가
후회해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은 반드시 우릴 후회하게 하고
후회하고 있다는 건 이미 실패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세상에 적개심을 가져선 안 돼
누구의 세상도 아니니까
나는 어떻게든 무사히 여길 빠져 나가고 싶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는데 모두가 떠난 듯한 곳에서
114 안내원은 사랑합니다 고객님, 하고 별안간 고백했다
사랑은 도처에서 좀비처럼 나타난다
그건 언제나 정신이 좀 없지
하지만 사랑을 사랑해
시는 시인을 죽인다는 말 가지고는 이제 행복해지지 않아
날 갖고 더는 실험하지 않을 거야
나가려면 인정해야 한다. "나는 당신이랑 같아."
자백에는 자백 몰래 끼워 넣은 유언(遺言) 냄새가 나지
저 티브이가 내게 뭔가를 끊임없이 개인 교습하듯
테이크 다운 이후의 그라운드 공방에서 포옹한 두 격투가는
연애하는 자세로 죽어라 치고받고
제 신(神)에게 제 나라를 부동산으로 바치려는 자가 파안대소하고 있고
터미네이터는 소방차 앞에서 재난 선포나 하고
그리고, 느닷없이 옷을 바꿔 입고 나타난 하프타임의 치어걸들을
나는 멍한 눈으로 본다
그래도 사는 것에는 사는 것 이상(以上)의 뭔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니
구름모자 쓴 15층 옥상 위로 섬광처럼 새들이 날아갔다
수치심으로 빨갛게 몸을 데우는 저녁나무 밑에는
너무 가까워 폴짝, 뛰어내리고 싶은 지상(地上)이 있다
비닐 같은 비늘을 벗어 놓고 어마어마한 짐승이 지나갔을 것이야
그러한 뿌연 공기 사이로
또 그러한 현기증 사이로
개를 안고 비비고 핥으면서 식후의 여자들이 지나간다
제 몸으로 그것을 낳기라도 했다는 듯
그러나 이것은 다만 휴일의 흐릿한 풍경 풍경
커튼을 내리면 사라져 버릴 것들
애들은 절대로 미치지 않아요
출혈하고 돌아온 몸이 뭔가를 토하려고 다시
털썩, 식탁에 주저앉았을 때부터
너무 멀고 어지러운 바깥을 향해 나에게는
약간의 연기(演技)가, 이를테면 고요한 몸부림이 필요했다
아무리 더러운 것도 만지고 빨고 껴안고 싶은 순간이 온다
술잔에 물든 사양(斜陽) 흔들리다 꺼지면
창밖의 어둠, 천천히 걸어 안으로 들어온다

출처 : 노작문학상 수상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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