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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춘시모음 20편/그도세상
11 그도세상김용호 2021.01.22 19:27:42
조회 84 댓글 0 신고
이영춘시모음 20편
☆★☆★☆★☆★☆★☆★☆★☆★☆★☆★☆★☆★
《1》
가을 산사에서

이영춘

가을 산사에서 하룻밤을 지샌다
깊이 잠든 별도 쳐다보고
숲 속에서 이는 바람소리도 들으면서
큰스님의 이야길 듣는다
내 진작 어려서부터 중은 안 되더라도
절을 가까이 하면서 살았더라면
스님의 깊은 언저리라도 배웠을 것을.
밤 깊어 스님은 풍경 속으로 잠들고
슬프도록 적막한 고요 속에서
나는 홀로 귀 세운 짐승처럼
어디선가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산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
오늘밤은 이 산사에서 귀를 뉘이고
내일은 또 어느 곳에 가서
잠들 것인가를 생각한다
☆★☆★☆★☆★☆★☆★☆★☆★☆★☆★☆★☆★
《2》
골목 안 맨 끝 집

이영춘

골목 안 맨 끝 저 집에 귀 뉘인 자 누구일까
신발 두 켤레 댓돌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고
문틈 새로 희미한 불빛 가쁜 숨 고른다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은 저 속의 삶,
어디론가 집 떠난 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것 칭얼대는 소리, 남루한 창틀 흔들리는 소리
갈퀴같이 마디 굵은 손으로 양은 냄비 달그락대는
저 빈 그릇의 헛한 마음,

발자국 소린가 귀 기울여도 돌아오지 않는 소리

어느새 골목 안은 죽은 듯 깊은 잠에 바지고
홀로 잠들지 못하는 이 동네 맨 끄트머리 저 집엔
누가 있어 이 밤도 등불 내리지 못하고 있는가
☆★☆★☆★☆★☆★☆★☆★☆★☆★☆★☆★☆★
《3》
귀의 외출

이영춘

세상이 싫은 날은 산을 오른다
사람의 소리, 세상의 소리,
귀 밖으로 멀다
솔잎 새로 흘러가는 바람 소리
새들이 양말 벗고 노는 소리
꽃들이 침묵으로 앉아 웃고 있는 소리
풀잎들이 어깨동무하고 걸어가는 소리
선승 같은 나무들이 무(無)의 말로 경(經) 읊는 소리
어느새 하늘이 걸어 내려와 내 손목 잡고
산 능선을 넘는다
천지가 온통 한 몸이다
내 귀가 환하다
☆★☆★☆★☆★☆★☆★☆★☆★☆★☆★☆★☆★
《4》
균열

이영춘

우리는 너와 나의 관계에서 존재한다
한 사람은 위에 있고 한 사람은 아래에 있는 관계가 아닌,
한 사람은 앞에 있고 한 사람은 뒷자리에 있는 관계가 아닌,
세상은 이것을 뒤집으려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뒤집는 것은 적폐다

너와 나의 관계에는 거래가 존재한다 뒷거래가 아닌 균등의 거래
네가 한 그릇의 밥을 사고
내가 한 사발의 국수를 사고---평행이다 국수올 같은

모든 관계는 관심에서 존재한다. 존재는 관심이다
감정의 질량이다 저 깊은 심층을 뚫고 올라오는 리비도의
질량, 리비도는 파고가 강하다

이 파고의 질량으로 너와 나의 관계는 깨지기도 하고 존재하기도 한다

관계는 바퀴다 바람의 바퀴, 감정의 바퀴. 거래의 바퀴,
그 바퀴는 오늘도 나를 끌고 아슬아슬하게 돌아간다
잘 살아냈다고 나는 나의 보이지 않는 감정에게
적막한 하루의 목덜미를 어루만져 준다
☆★☆★☆★☆★☆★☆★☆★☆★☆★☆★☆★☆★
《5》
노자의 무덤을 가다

이영춘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보았다
한 줌 바람으로 날아가는 사람을 만났다

지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상은 빈 그릇이었다

사람이 숨 쉬다 돌아간 발자국의 크기
바람이 숨 쉬다 돌아간 허공의 크기,
뻥 뚫린 그릇이다,
공(空)의 그릇,

살아있는 동안 깃발처럼 빛나려고
저토록 펄럭이는 몸부림들,

누구의 그림자일까?
누구의 푸른 등걸일까,

온 지상은 문을 닫고
온 지상은 숨을 멈추고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그릇,

빈 그릇 하나 둥둥 떠 있다
☆★☆★☆★☆★☆★☆★☆★☆★☆★☆★☆★☆★
《6》
다하는 것

이영춘

진심을 다하고
몸을 다하고
시간을 다하고
삶을 다하고
믿음을 다하고
사랑을 다하고
맞추기를 다하고
흐르는 마음속을
아이처럼 다하는 것
☆★☆★☆★☆★☆★☆★☆★☆★☆★☆★☆★☆★
《7》
따뜻한 편지

이영춘

은행 창가에서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춘천 우체국에 가면 실장이 직접 나와 고객들 포장박스도 묶어 주고
노모 같은 분들의 입?출금 전표도 대신 써 주더라.“고 쓴다
아들아, 이 시간 너는 어느 자리에서 어느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라고 쓴다
나도 내 발자국을 수시로 돌아보겠지만
너도 우체국 실장처럼 그렇게 하라고 일러 주고 싶은 시간이다

겨울날 창틈으로 스며드는 햇살 받아 안듯
“비오는 날 문턱까지 손수 우산을 받쳐 주는 그런 상사도 있더라.”고 덧붙여 쓴다

살다보면 한쪽 옆구리 뻥 뚫린 듯 휑한 날도 많지만
마음 따뜻한 날은 따뜻한 사람 때문이란 걸 알아야 한다

빗줄기 속에서, 혹은 땡볕 속에서
절뚝이며 걸어가는 촌노를 볼 때가 있을 것이다
네 엄마, 네 외할머니를 만난 듯
그들 발밑에 채이고 걸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마음 눈 속에 옷을 입혀야 한다

공부라는 것, 성현의 말씀이란 것,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사람 위에 사람을 보지 말고
사람 아래 사람을 보는 눈을 키워라, 그러면
터널처럼 휑한 그들 가슴 한복판을 가득 채우는 햇살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아들아,
비오는 날 은행 창가에서 순번 기다리다 지쳐 이 편지를 쓴다
☆★☆★☆★☆★☆★☆★☆★☆★☆★☆★☆★☆★
《8》
때로는 물길도 운다

이영춘

냇가에 앉아 물소리 듣는다
물소리에 귀가 열리고 귀가 젖는다

물길이 돌부리에 걸린다
풀뿌리에 걸린다
걸린 물길 빙ㅡ빙 원 그리며 포말이 된다

물길도 순리만은 아니었구나
이 지상의 길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밀려나고 밀어내는 등(背) 뒤편 같은 것,

오늘 이 봄, 냇가에 앉아
물길도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소리 없는 소리로 울며 간다는 것을 알았다

출처 : 시집 《오늘은 같은 길을 세 번 건넜다》(천년의 시작 2020)
☆★☆★☆★☆★☆★☆★☆★☆★☆★☆★☆★☆★
《9》
만해 마을에서의 하룻밤

이영춘

큰산이 나를 안고 잠을 잤다
나는 밤새 그의 품속에서
하얗게 설레였다

몇 억겁이나 흐르면
그를 닮은
큰 아이 하나 낳을 수 있을까
☆★☆★☆★☆★☆★☆★☆★☆★☆★☆★☆★☆★
《10》
별 우체국

이영춘

너무 멀리 갔다
발자국이 지워진 너의 길
지상의 풀벌레도 어느 새 길을 잃고
밤새 목청 터지도록 너에게로 가는 길을 묻는다

계절을 끌고 가는 저 허공의 길
허공을 채우는 별 잎사귀들이
점점이 붉은 방점으로 너를 깨우는데
별 우체국,
너는 어느 유목민의 자손인가
아득히 소식이 멀다

그 먼 나라에 잠들었을 너에게
나는 수신인 없는 편지를 쓴다
어느 별 우주 정거장에서 붉은 귀 세우고 있을까
별들이 소리 없이 우는 밤,
그 울음소리에 귀 묻고 앉아 귀먼 편지를 쓴다
밥알처럼 한 스푼씩 떠 음미할 눈물을 쓴다

지상에는 네가 사랑하던 너의 꽃잎들 소식은 멀고
네가 등 기대고 눕던 붉은 탯줄도
너를 따라 그 나라에 든 지 오래다
지상은 청 빈 정거장
붉은 꽃잎들 뚝뚝 떨어져 빈집뿐이다
네 혈흔처럼, 발자국처
나는 오늘 밤 아득한 그 나라에
별 우표를 붙인다
☆★☆★☆★☆★☆★☆★☆★☆★☆★☆★☆★☆★
《11》
세월

이영춘

한 폭도 못 되는 내 손등을 들여다보면서
손등 면적보다도 넓고 깊게 골진
세월을 읽는다.

애써 공들이지 않았어도
애써 힘들이지 않았어도
이토록 골 깊이 뿌리내린 세월.

한많은 그 광음 속에
진정 내가심은 것은 무엇인가?
새삼 내 정원이 텅 빈 것을 알았을 때
어이없게도 그 텅 빈 사잇길로
구름 몇 조각이 흘러가고 있었다.
☆★☆★☆★☆★☆★☆★☆★☆★☆★☆★☆★☆★
《12》
슬픈 가을

이영춘

쨍그렁 깨질 듯한 이 가을 하늘
눈물겹다
무거움의 존재로 땅 끝에 발붙인 짐승
부끄럽다
멀리 구름은 유유히 흘러가고
가을 잠자리들 원 그리며 무리 짓는다
유리구슬처럼 반짝이는 이 가을 햇살 아래
아, 아프구나! 가볍지 못한 존재의 무게가

제 무게이기지 못하여 모두 털고 일어서는 이 가을날에
나는 무엇이 이토록 무겁게 허리를 잡아당기고 있는가 
☆★☆★☆★☆★☆★☆★☆★☆★☆★☆★☆★☆★
《13》
슬픈 도시락

이영춘

춘천시 남면 발산중학교 1학년 1반 류창수
고슴도치같이 머리카락 하늘로 치솟은 아이
뻐드렁 이빨, 그래서 더욱 천진하게만 보이는 아이.
점심시간이면 아이는 늘 혼자가 된다.
혼자 먹는 도시락,
내가 살짝 도둑질하듯 그의 도시락 속을 들여다볼 때면
그는 씩- 웃는다
웃음 속에서 묻어나는 쓸쓸함.
어머니 없는 그 아이는 자기가 만든 반찬과 밥이 부끄러워
도시락 속으로 숨고 싶은 것이다.
도시락 속에 숨어서 울고 싶은 것이다.
'어른들은 왜 싸우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인지?'
깍두기 조각 같은 슬픔이 그의 도시락 속에서
빼꼼히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
《14》
시간 저쪽의 뒷문

이영춘

어머니 요양원에 맡기고 돌아오던 날
천 길 돌덩이가 가슴을 누른다
“내가 왜 자식이 없냐! 집이 없냐!” 절규 같은 그 목소리
돌아서는 발길에 칭칭 감겨 돌덩이가 되는데

한때 푸르르던 날 실타래처럼 풀려
아득한 시간 저쪽 어머니 시간 속으로
내 살처럼 키운 아이들이 나를 밀어 넣는다면

아, 아득한 절망 그 절벽……

나는 꺽꺽 목 꺾인 짐승으로 운다

아, 어찌해야 하나
은빛 바람결들이 은빛 물고기들을 싣고 와
한 트럭 부려놓고 가는 저 언덕배기 집
생의 유폐된 시간의 목숨들을

어머니의 시간 저쪽 뒷문이 자꾸
관절 꺾인 무릎으로 나를 끌어당기는데
☆★☆★☆★☆★☆★☆★☆★☆★☆★☆★☆★☆★
《15》
아파트의 오후

이영춘

오후의 긴 햇살이 고층 아파트 난간에 걸려 너울거린다
어디선가 아이들 떠드는 소리, 우는 소리
이것이 사람 사는 모습인가 여기면서도
금세 쓸쓸해지는 나는
어느 귀 큰 사람의 자식이었던가

적막하다 아파트 숲은,
저 많은 창마다 밤이면 별을 삼킬 듯
등불이 켜지고
창문 한 번 신통히 열어 보지 못한
내 삶은
지금 뉘 집 문 밖의 등불로 흐를 수 있을까
☆★☆★☆★☆★☆★☆★☆★☆★☆★☆★☆★☆★
《16》
연가

이영춘

내 가슴속 은밀히 자라는
꽃씨 하나
기다림에 목말라 노오란 싹이 트고
그리움에 목말라 비가 되고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무슨 노래를 할까
환희의 내란으로 밤은 깊어 가는데
그대는 내 손길 닿을 수 없는
아득한 강 저 편에
노오란 노을로 떠 있다.
☆★☆★☆★☆★☆★☆★☆★☆★☆★☆★☆★☆★
《17》
연탄불

이영춘

고1 때 방 한 칸 얻어 할머니와 자취하던 방
연탄 한 장으로 24시간을 버티던 방
그 방 지금 그립다
아랫목에 이불 한 장 깔아 놓고
밥 한 그릇 떠 이불 속에 넣어 두고
날 기다리던 방
그 방 지금도 춥다

노란 부리에 송곳니 같은 꿈 키워내던 방
냉골이 더 시원하시다며 윗목에서
늘 새우잠을 주무시던 그 방
시린 목 줄기에 선명히 떠오르는 사람 하나
그 사람 지금 그립다

누군가의 시에서 "지상의 방 한 칸"을 노래하였듯이
이 지상에 내 소유로 된 방 한 칸 없었어도……
☆★☆★☆★☆★☆★☆★☆★☆★☆★☆★☆★☆★
《18》
죽은 새를 만나다

이영춘

청평역 플랫폼에
밤톨만 한 새 한 마리 쓰러져 있다
고, 어린 것이 왜 죽었을까?
노랑색 바탕에 파랑색 줄무늬 날개옷을 입은
환상의 무지개다
스크린도어가 궁전인 줄 알고 날아들다 유리문에 박혀 뇌출혈을 일으킨 걸까?
어느 산속 외딴 숲에서 사람이 그리워 내려왔던 길일까?
바람의 시샘에 집을 잃은 것일까?
고, 작은 예쁜 몸으로 무엇이 그리웠을까?
지상에는 흉악한 물건과 눈알과 불빛과 송곳과 간사한 사람들의 마음이 살고 있는데
어린 너는 '천진, 순진'만 믿고 세상이 그리워 왔던 것인가 보다
말없이 애타게 불쌍하게 죽은 네 어린 목숨을 보며
무기력한 나를 원망한다
더구나 너의 작은 몸을 내 손수건에 고이 감싸 안고 와
어느 개울가 돌무덤에, 혹은 꽃나무 가지 밑에 묻어주지 못한 나를 후회한다
나는 나를 장사 지내야 한다
판결문 한쪽에 비수를 꽂듯이
비정했던 나의 몸과 마음에
붉은 수의를 입히고 있는 밤이다

출처 : 《시인동네》(2020 6월호)
☆★☆★☆★☆★☆★☆★☆★☆★☆★☆★☆★☆★
《19》
평행선 애인

이영춘

분명, 한 탯줄을 타고 나온 아이였는데
네 사상의 분자들은 강 저쪽에 떠 흐르고
내 사상의 알갱이는 강 이쪽에 떠 흐르는구나
먼지 낀 세상의 창은 흐리기만 한데
도수 놓은 안경을 끼어도 세상은 보이지 않는데
너는 흐린 창 저 너머에서 세상 읽는 법을 찾는구나
한 탯줄에서 분화된 입자들이
낱낱, 실오라기 같은 생각의 날개를 달고
서로 다른 창 밖을 달리고 있구나
미망의 도시, 미명의 거리,
고전의 장벽 같은 성(城)안에서
등불은 누구를 위한 횃불인가
혁명은 누구를 위한 깃발인가
사상의 바람이 갈지자로 횡행하는 이즘
한 탯줄 한 배꼽에서 자란 목숨들이 길을 잃고
서로 다른 눈먼 길을 가고 있구나

출처 : 《문학청춘》(2020 여름호)
☆★☆★☆★☆★☆★☆★☆★☆★☆★☆★☆★☆★
《20》
포장마차 어머니

이영춘

어머니는
새벽 세 시에야 돌아오고
우리들은 늘
어머니 손길 대신
조그만 뜰에 내려와
싸늘하게 졸고 있는
별들과 이야기하며
밤을 지샜다
우리들의 밥상에는 늘
밥 대신
라면이나 국수올들이
어머니 사랑처럼
줄지어 오르고,
그러나 끝끝내 우리들의 공백은
채워지지 않았다

새벽 세 시에야 돌아와 누운
어머니의 긴 앓음 소리에
우리가 먹은 국수올들이
새삼
어머니의 목숨이란 것을 알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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