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배우가 있다. 아역을 하기엔 너무 의젓하고, 성인역을 하기엔 너무 풋풋한. 정태우와 류덕환은 그 경계에 놓인 배우였다. 똑같이 여섯 살에 데뷔한 둘은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선후배 사이로 정태우가 안 입어본 한복이 없다면 류덕환은 안 입어본 교복이 없을 만큼 아역부터 꾸준히 경력을 쌓아왔다. 닮은 듯 다른 두 배우는 극작가 피터 쉐퍼의 대표작 <에쿠우스>의 알런 역으로 나란히 무대에 오른다. 연출자로 나선 조재현은 사극에 익숙해 몰입이 빠르고 틀에 충실한 정태우에게는 '풀어놓기'를, 영화에 익숙해 순발력이 강하고 리액션이 유연한 류덕환에게는 '조이기'를 요구했다. 정태우의 알런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다이너마이트라면 류덕환의 알런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인 셈. 둘의 알런은 각기 다른 색일 테지만 그들이 꿈꾸는 무대는 결국 하나다. 오직 너제트라는 말만을 포옹하는 순수한 소년도, 그렇게 사랑하는 말의 눈을 쇠꼬챙이로 찌른 광기어린 소년도 모두가 알런인 것처럼.

editor_김아형 photographer_한길

듬쑥한 눈동자로 응시하다_ 정태우

지난 겨울 대학로에서 만난 조재현은 그에겐 바이블이나 다름없는 연극 <에쿠우스>에 대한 새로운 구상을 이야기했다. 오랜 시간 고민해온 무대인만큼 그에겐 주인공 알런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연기 욕심이 있는 남자 배우라면 누구나 한번은 알런을 꿈꾸었을 터. 오디션에 수많은 응시자가 몰렸지만 조재현에겐 연기력도 외모도 아닌 '소년의 눈빛'이 관건이었다. 한참만에 그가 손을 잡은 건 맑은 갈색 눈동자를 지닌 정태우였다. "연극은 늘 하고 싶었어요. 조재현 선배가 무대와 스크린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연기하는 모습이 부러웠거든요. 어느 한 매체로 국한되지 않는 배우라는 건 모든 연기자의 꿈이거든요. 얼마 전 소극장 뮤지컬 <재즈 루나틱>에 출연하면서 그런 생각들이 강해졌는데 때마침 기회를 주신 거죠. 워낙 쟁쟁한 선배님들이 하셨던 <에쿠우스>의 명성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 공연을 본적은 없어서 더 궁금했어요. 요즘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두 번이나 알런을 연기한 조재현이 연출을 하고 2대 알런인 송승환이 상대역인데 부담되지 않나?"인데 솔직히 그런 부담은 없어요. 그분들과 제가 비교할만한 대상이어야 말이죠. (웃음) 선배들을 뛰어넘겠다는 뜻이 아니라 알런을 할 수 있는 배우로 인정받았다는 것만으로 행복하거든요. 아마 덕환이도 그럴 거예요." 겸손하게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정태우는 알런 그 자체였다. 알런을 연상시키는 갈색 가죽점퍼와 워커 차림 때문은 아니다. 묘한 갈색 눈동자의 조도를 높이고 골똘한 생각에 잠긴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알런이었다.
아역 배우로 데뷔해 스무 해 넘게 연기자의 길을 걸어온 정태우는 유독 사극과 인연이 깊었다. 영특한 세자에서 비운의 왕으로, 그리고 현명한 책사까지 지나온 작품들마다 그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자국을 남겼다. 특히 '광기 어린 역할'을 해보고 싶다던 오랜 바람을 연산군을 통해 이루면서 그는 부쩍 비현실적인 캐릭터에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사극 속 인물들을 보면 권력다툼으로 인해 자신의 혈육을 죽여야 하는 등 현실에는 존재하기 힘든 캐릭터가 많거든요. 그가 처한 상황에서 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그 복잡한 심정을 설득력 있게 표현해야하는 점이 배우를 자극시키죠. 그런 매력에 사극을 계속할 수 있었어요. 사실 <에쿠우스>도 비슷한 맥락에서 끌렸던 거고요."
매번 <에쿠우스>가 공연될 때마다 파격적인 노출 씬은 화제를 모은다. 게다가 이번 공연에는 다이사트와 알런의 관계를 동성애적인 맥락에서 접근해보겠다는 조재현의 의도까지 더해져 알런에 지워진 짐이 무겁다. "9살 이후 첫 노출연기를 앞둔 터라 회식 한 번 마음 놓고 못한다"며 웃던 그가 불쑥 옆에 있던 류덕환에게 묻는다. 일주일 넘게 잠수를 타거나 정신을 잃을 만큼 술을 마시는 등 한번은 제멋대로 살아보고 싶지 않았는지를. 타고난 성품이 그러지 못한 탓도 있지만 일찌감치 공인의 삶에 익숙해진 그에게는 행동의 제약이 많았을 것이다. 해외의 아역 스타들이 성장하면서 저지르는 일탈 행위들이 빈번히 가십란에 오르는 것도 그런 이유일 터. "배우라면 극한의 감정을 경험해봐야 한다며 자유롭게 사는 이들이 멋있어 보이던 때가 있었죠. 지금은 싫지만, 한 때나마 갈증 났던 것들을 연극을 하면서 은근히 해소하고 있어요." 매니저 없이 홀가분한 차림으로 연습실에 가고, 끝나면 동료들과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작품 이야기를 하는 맛에 푹 빠진 정태우. 그의 맑은 눈동자가 어느새 조도를 낮추고 객석을 응시하고 있다.
 

벼르고 벼린 날을 세우다_ 류덕환

일찌감치 알런으로 캐스팅 된 정태우는 더블캐스트에 후배 류덕환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고 했다. 심히 앳된 얼굴의 류덕환을 미심쩍어 하던 조재현도 그를 만나자마자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을 만큼 그는 준비된 알런으로 <에쿠우스>에 합류했다. 대학입시 실기로 <에쿠우스>를 택했던 것도 모자라 그는 공연 영상을 구해 수십 번을 돌려보았는가 하면 대학 진학 후 무대미술 수업에서는 <에쿠우스>의 미니어처 무대를 만들었을 정도로 작품에 대한 애정이 컸다. "오디션 소식을 접하고는 너무 하고 싶어서 기획사에 얘기했는데 전달이 안되어 피드백이 없었어요. 그렇게 포기해야하나 싶었던 찰나 조재현 선배 쪽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만나자마자 앤딩 장면을 이런 느낌으로 가고 싶다고 온갖 의성어를 동원해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하시는데 그 자리에서 오케이 했죠. 18살부터 입에 달고 살았던 작품인걸요. 사실 그동안 연극이 너무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구체적으로 진행했던 작품도 몇 있었는데 공연으로 이어지진 못했던 게 많이 아쉬웠는데 <에쿠우스>를 하려고 그랬나 봐요. (웃음) 알런을 하셨던 선배들이 대부분 30대였으니까 언젠가는 기회가 오리라 생각했는데 최연소 알런이라니 영광일 따름이죠."
사실 에디터는 두 해 전 류덕환과 함께 공연을 보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당시 갓 스물을 넘긴 청년의 이야기 중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면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관점에서 새로운 시나리오를 써본다"던 이야기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에쿠우스>에는 어떤 새로운 시나리오를 썼을지 궁금했다. "시도는 해봤는데 뭘 쓸 수가 없었어요. 피터 쉐퍼의 희곡이 너무 치밀해서 감히 끼어들 틈이 없더라고요. 6살, 12살의 알런이 이미 극 속에 묘사되어 있거든요. 그나마 잡아본 건 평소에는 무엇을 했을 것이다, '각형'으로 들어갈 때마다 감정이 어떻게 달라질 것이다 정도에요. 그렇게 두어 번 리딩을 했을 뿐인데 곧장 런을 가는 거예요. 덕분에 대사도 빨리 외웠고 전체적인 흐름이 빠르게 잡혔죠." 스물셋 류덕환의 해맑은 미소에 열일곱 알런이 묻어난다. 늦게 합류한 그에게 알런의 감정선과 그 흐름을 먼저 습득시키고자 조재현은 일찌감치 런으로 연습을 진행했다. 스스로 '막런'이라고 표현할 만큼 애드리브를 남발했던 류덕환의 첫 번째 런이 끝나자 조재현은 그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면이 좋았다는 의외의 칭찬을 건넸다. 류덕환이 가장 많이 고민한 부분은 알런과 다이사트의 첫 만남. 그는 약속된 동선에 따라 연기하지 않았다. 아직 알런에게 다이사트는 다이사트가 아니라 수많은 의사 중 하나인 시점에서 정형화된 연기는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알런이 점차 바뀌어 가는 것이 다이사트의 영향이란 사실에 힘이 실린다는 것이다. 이를 수렴한 조재현은 그가 혹 예상 밖의 움직임을 보이더라도 상대 배우가 당황하지 않도록 대사만큼은 텍스트 그대로를 외울 것을 당부했다.
"저는 공연하는 동안 매일 똑같은 알런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관객들이 볼 때는 '뭐가 달라?' 할 수도 있지만 저는 사소한 것 하나라도 매번 새롭게 접근할 생각이에요. 제가 단지 알런 스트렁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류덕환의 알런을 연기하는 것처럼, 이미 <에쿠우스>를 알고 있는 관객들은 익히 알고 있는 알런이 아니라 류덕환의 알런을 보러 올 테니까요." 그리고는 빨리 나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의외의 발언을 한다. 빨리 나이 먹길 원하는 이유는 딱 하나, 표정을 더 깊고 풍부하게 해주는 주름이 갖고 싶어서. 이토록 연기 생각뿐인 욕심 많은 배우에게 어찌 목표를 묻겠는가. 벼리고 벼린 날을 세운 류덕환이 베지 못할 것은 없다.
 

<에쿠우스>의 백미는 의사 다이사트가 열일곱 소년 알런에게 느끼는 콤플렉스에 있다. 그가 수년 째 아내와 섹스리스로 지내는 동안, 알런은 모두가 잠든 밤 말을 타고 나와 말의 피부에 흐르는 땀을 핥고 있었다.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그리스 신들의 두상을 쳐다만 보고 있을 때, 알런은 자신의 신(神)인 에쿠우스와의 합일을 추구하고 있었다.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인가. 정열이란 파괴될 수는 있지만 창조될 수는 없는 법, 다이사트는 알런의 치료 여부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사각의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이 원초적인 제의에 관객들은 압도되었고, 강태기·송승환·최재성·최민식·조재현·김영민 등 알런을 거쳐 간 배우들은 연극계의 스타가 되었다. 이제 새로이 탄생한 두 명의 알런. 그들이 이끄는 제의에 초대받은 자 복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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