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모든 것은 불현듯이었다 / 김정한

생의 모든 것은 불현듯이었다. 사랑이 찾아오는 것도 사랑이 떠나가는 것도, 다리가 끊어지는 것도,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가 그치는 것도. 막무가내로 쓸쓸했던 마음에 웃음이 차오르는 것도, 모두 불현듯이었다. 그 불현듯이 웃음을 불러내고, 눈물을 불러낸다. 어젯밤 9시 뉴스에 견고한 콘크리트 벽을 두드리며, '한 번만' 도와달라는 외마디 비명을 남기고 떠난 가장의 최후도 눈에 아른거린다. 성실하게 간절함으로 살아도 안 되는 일이 분명 있다. 헛헛하고 침울하다. 새벽 2시, 뎅그랑 뎅그랑 울리는, 내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노랑나비가 노래를 부르는 따듯한 봄날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방안을 떠도는 어휘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심장을 쏘는 강력한 단 한 줄의 문장을 거둬들이기 위해. 그렇게 컴퓨터에 갇힌 각각의 이름을 부르면서 밤을 샌다. 다시 아침, 거칠게 비를 쏟아냈던 어제는 떠나고, 눈부신 햇살이 창문 앞에 소풍 와 있다. 어쩌면 밤새도록 작업하던 나를 위로하듯, 스스로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소풍 가는 마음으로 일어나 눈부신 햇살을 따라 걸었다. 어제까지 지치고 쓸쓸해서, 조금은 불행했던 생각주머니가 이사를 간 듯. 쑤시고 흔들리던 두통도 사라졌다. 아침 10시, 며칠을 숨죽여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함께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막무가내로 침울했던, 절망스러운 날들에 대한 반전이 찾아왔다. 정말 불현듯, 갑자기였다. 목소리까지 춤추듯 사정없이 기뻤다. 차오르는 넉넉함, 충만함, 밀려드는 행복감. 단단히 신념으로 길어 올린 내 시가 이렇게 하나의 천국의 문을 열었다. 달래듯, '나를 울렸다, 웃겼다' 하며,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 불현듯 찾아드는 것들을 껴안으니, 곤궁의 질곡 속에서도 간간이 기쁘다. 어쨌든 몇 개월의 식량을 선물 받았다. 햇살이 눈부신 이 아침, 쓰디쓴 블랙커피가 달달하게 혀끝을 맴돈다. 너무 좋은 빨간 날, 오랜만에 최고의 하얀 웃음이 쏟아져 나왔다. 불현듯 찾아온 오늘, 나는 풍요롭다. 오늘같이 좋은 빨간 날, 하늘을 맘껏 날며 오롯이 나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김정한 신작 [ 길 위의 인생 수업 p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