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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더그 라이만

주연 : 톰 홀랜드, 데이지 리들리, 매즈 미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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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은밀한 생각이 실시간으로 노출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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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어쩔 수가 없이 속으로 하는 생각과 겉으로 내뱉는 말이 다르다. 특이 나이가 들어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속과 겉의 차이는 점점 커져만 간다. 얼마나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느냐가 사회생활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속으로 하는 생각이 여과 없이 실시간으로 노출된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세상에는 나의 비밀이 없어질 것이다. 나의 속마음이 까발려지면서 나는 벌거벗은 채 세상에 혼자 서있는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마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대인기피증에 걸려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사람과 만나는 것을 거부하지 않을까?

비슷한 소재의 영화가 있었다. 2003년 국내 개봉했던 일본 영화 [사토라레]이다. [사토라레]는 의지전파과잉 증후군이라는 가상의 증상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의지전파과잉 증후군이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사념파로 변경되어 반경 10m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전달되는 이상 현상으로 천만 명의 한 명꼴로 나타나고, 의지전파과잉 증후군에 걸린 사람은 어김없이 IQ180 이상의 천재라는 설정이다. 그렇기에 정부에서는 의지전파과잉 증후군에 걸린 사람들을 은밀히 관리하며 그가 천재성을 발휘하여 국가의 이익에 기여하도록 이끈다. 의지전파과잉 증후군에 걸린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사토라레]는 의지전파과잉 증후군에 걸린 켄이치(안도 마사노부)가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영화이다.

[사토라레]를 재미있게 봤지만, 내가 만약 의지전파과잉 증후군에 걸렸다면 정말 끔찍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 주말에 개봉한 [카오스 워킹]은 [사토라레]보다 더하다. [카오스 워킹]은 모든 생각이 실시간으로 노출되는 노이즈에 감염된 사람들이 사는 뉴월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뉴월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노이즈에 감염되어 있기 때문에 생각이라는 것을 숨길 수가 없다. 게다가 뉴월드에는 여자가 없다. 모든 여자들이 행성의 토착민들에게 몰살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이즈에 걸리지 않은, 하물며 여자인 바이올라(데이지 리들리)가 나타나며 뉴월드는 일대 혼란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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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짜고짜 새로운 세계관을 들이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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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제목에 혼돈, 혼란을 의미하는 카오스(Chaos)가 들어가는 영화답게 [카오스 워킹]은 굉장히 혼란스럽게 영화를 시작한다. 영화의 설정상 인류는 지구가 황폐해지자 지구를 버리고 다른 행성으로 이주를 했고, 그곳을 뉴월드라고 이름을 붙이며 새로운 터전을 만들었다. 뉴월드에 이미 토착하고 있던 외계인과 분쟁이 있었고, 그러한 분쟁으로 뉴월드의 모든 여성들이 몰살을 당했다. 토드(톰 홀랜드)는 뉴월드에서 태어난 이민 2세대이다. 문제는 이러한 설명이 거의 생략된 채 관객이 스스로 유추해내야 된다는 것이다. 웬만한 영화라면 영화가 시작하기 전 자막을 통해 대강의 세계관을 설명할 텐데, [카오스 워킹]은 과감하게 세계관 설명을 생략해 버린다.

바이올라의 첫 등장도 그렇다. 미지의 행성에 착륙하려는 착륙선이 대기권에 진입하는 순간 어떤 사고를 당하여 불시착하고, 다른 대원들은 모두 죽고 바이올라만 살아남는다. 이 장면도 혼란스러운 것이 착륙선이 대기권에 진입하는 순간 대원들은 뭔가 봤다고 진술하고, 착륙선 안의 남자 대원들은 노이즈에 감염된다. 그리고 착륙선은 불시착한다. 노이즈가 어떻게 착륙선 안의 대원들을 감염시켰는지, 그리고 노이즈 감염과 착륙선의 불시착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영화는 설명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바이올라를 뉴월드에 혼자 떨어뜨려 놓고 '이제 알아서 해'라며 모르는 척해버린다.

'이게 뭐지?' [카오스 워킹]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이다. 뭔가 설명이 필요한데 영화는 설명 따위는 하지 않는다.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얼떨결에 혼자 뉴월드에 불시착한 바이올라의 두려움, 처음으로 여자를 본 토드의 당혹스러움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후 영화는 서두르지 않고 아주 천천히 영화의 세계관을 설명해 나간다. 노이즈에 감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는 능력을 지닌 카리스마 넘치는 뉴월드의 지도자 프렌티스(매즈 미켈슨)의 추악한 본심이 드러나며 그제서야 혼란스러웠던 세계관이 정리가 되며 영화의 스토리 전개는 본궤도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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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세계관을 단순화시키는 것도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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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티스 시장의 음모가 밝혀지면서 [카오스 워킹]은 굉장히 단순해진다. 영화 초반, 혼란스럽다고 느낄 만큼 세계관에 대한 부족한 설명과 부족한 설명으로 인해 복잡하게만 느껴졌던 세계관이 어느 순간 무지 단순해진 것이다. 뉴월드의 여자들을 몰살했다는 토착민 외계인은 잠깐 등장했다가 별 역할 없이 사라져 버리고, 바이올라가 탄 착륙선의 불시착에 대한 의혹은 아무런 설명 없이 흐지부지된다. 그저 남은 것이라고는 행성 궤도에서 대기 중인 2차 이민 우주선에 연락을 취해야 하는 토드, 바이올라와 그것을 막으려는 프렌티스 시장과 그가 이끄는 뉴월드 남자들의 추격전 뿐이다. 복잡해 보이는 세계관을 이렇게 단순하게 정리해 버리다니, 그것도 능력이다.

이렇게 스토리가 단순해지다 보니 영화 후반부의 긴장감 또한 특출나지 않다. 처음으로 이 행성에 도착한 우주선의 통신기를 이용해서 2차 이민 우주선에 연락을 취하는 바이올라와 토드, 어떻게든 바이올라와 토드를 막으려 하는 프렌티스 시장의 대결은 기대했던 것만큼 긴장감 넘치지는 않는다. 프렌티스 시장의 카리스마가 고작 과거의 죄책감 때문에 뒷걸음치다가 사그라들다니... 그 끝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비록 스토리 전개는 단순해졌지만 노이즈라는 [카오스 워킹]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소재만큼은 살아 있다. 바이올라를 통해 처음으로 여자를 접한 토드의 속마음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웃음 포인트이다. 바이올라는 생각이 없는데 토드는 바이올라와의 키스를 꿈꾼다. 키스를 하고 싶어 하는 토드의 속마음이 노출되자, 핀잔을 주는 바이올라와 민망해하는 토드의 모습이 여러 번 반복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웃게 된다. 키스 정도면 사실 양호한 거다. 더 야한 생각이 노출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 아니던가. 노이즈에 감염된 세상에 내가 토드의 나이로 살았다면... 으악 생각만 해도 민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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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월드 남자들이 집단 광기... 당신은 이해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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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카오스 워킹]에 대한 평가를 내리자면 그렇게 뛰어나지도, 그렇다고 그렇게 엉망이지도 않았다. 독특한 세계관을 단순화시켜버린 점과 영화 마지막의 긴장감은 아쉬웠지만, 의외로 톰 홀랜드와 데이지 리들리의 연기의 합은 좋았다. 특히 자신의 속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내야 하는 토드를 귀엽게 연기한 톰 홀랜드의 매력은 정말 역대급이다. 그가 영원히 귀여운 사춘기 소년으로 머물며 이런 캐릭터만 연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도 저런 사춘기 시절이 있었는데... 토드에게서 나의 사춘기 시절의 풋풋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영화에 대해서는 톰 홀랜드의 귀여운 연기 외에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영화를 보고 이틀 정도가 지나고 나니 뉴월드의 남자들이 어쩌다가 집단 광기에 휩싸였는지는 조금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나 역시 내 속마음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면 대인기피증에 걸려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혼자 숨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던가. 내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것처럼 뉴월드의 남자들 또한 두려웠던 것이다. 남자들의 속마음은 여과 없이 노출되는데 여자들의 속마음은 알 수가 없으니, 서로 속마음이 노출된 남자들끼리 뭉치며 속마음을 알 수가 없는 여자들을 경계하게 되었을 것이다. 경계심은 두려움이 되고, 두려움은 집단 광기가 된다. 그리고 그러한 집단 광기에 불을 잎인 것은 신앙이라는 힘으로 무장한 아론(데이빗 오예로워) 목사이다. 그렇다면 프렌티스 시장의 어이없는 최후도 이해가 된다. 그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노이즈에 감염되지 않은 여자들이었을 테니까.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사토라레]의 의지전파과잉 증후군에 걸리지도 않았고, [카오스 워킹]의 노이즈에 감염되지도 않았으니까. 우리는 여전히 나만의 은밀한 비밀을 속으로 생각을 하며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을 수가 있다. 모두가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솔직한 세상은 인간의 특성상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가 될 것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는 거짓으로 자기 자신을 위장해야 세상에 떳떳이 나설 수 있는 존재이니까. [카오스 워킹]이 노이즈라는 소재를 좀 더 진지하게 발전시켰다면 인상 깊은 영화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가벼운 킬링타임용 오락영화로 머문 점은 분명 아쉽다. 뭐 덕분에 토요일 아침에 이어, 일요일 아침도 아들과 함께 행복한 극장 데이트를 즐길 수는 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