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고 난 후부터 배경화면으로 저장해놓고 있던 영화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리뷰를 다시 남기려고 한다. 50대 중년의 역할을 맡고 있는 이자벨 위페르(나탈리 役)는 중년의 메마른 일상에도 불구하고 일단, "예쁘다." 아이러니하게도 감독은 나이가 한참 어린 미아 한센-러브, 영화는 2016년 개봉했다.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은곰상)을 받았고, 이자벨 위페르는 제81회 뉴욕비평가 협회상, 제37회 런던 비평가 협회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보고 싶은 영화로 남길래 기록으로 남겨본다.

파리의 한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유능한 교사 나탈리. 뚜렷한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살지만 그렇다고 인생도 뚜렷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되려 남편은 어린 여자가 생겼다면서 이혼을 선언하고, 나탈리의 일상에 끊임없이 잡음이 생기기 시작한다. 불협화음이 오히려 생생한 화음이라고 말한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말이다. 애정결핍처럼 극도의 불안 증세를 보이던 모델 출신 홀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이들도 성장해서 자신들의 둥지를 찾아 떠난다. 자식 같은 자신의 철학 책은 이제 읽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개정을 거부당하고 교과서 집필진에서도 탈락한다. 아끼던 제자에게도 배신감을 느끼고 한꺼번에 몰아쳐온 변화 이후 다가오는 것들이 어떤 것일까.

영화 첫 장면, 수업 철학 수업 장면부터 스크랩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저항해야 한다며 피켓을 들고 있는 학생들을 피해 냉정을 유지하며 수업을 하러 뛰어가는 그녀의 모습, 하지만 그녀에게도 반전 있는 과거가 있었다. 마르크스 사상에 빠져 있던 운동가였다는 것. 하지만 이제 그녀는 사회적 이념을 위해 싸우기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가족의 배경이라는 역할에 두면서 살게 된 중년이다. 밖으로는 사회 운동을 하는 목소리 뒤로 제자들과 교실을 지키며 철학 수업을 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해 행동을 강요하는 메시지, 그 이면에 세밀하게 깔아놓은 무언가를 볼 수 있는 직관이라도 생긴 것처럼. 하지만 그 확신으로부터도 그녀 자신의 인생은 지킬 수 없었다. 하나씩 무너져가는 그녀의 일상, 촘촘하게 그녀의 세계를 파고들었던 관계들이 하나둘 이탈하기 시작했다. 죽음, 이혼, 독립, 박탈, 탈락, 상실, 배신감이라는 이름으로 하나 둘 그녀 곁을 떠나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영화 제목이  '다가오는 것들'이라기보다는 중년의 '상실의 시대'쯤으로 해야 맞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쌓아둔 것들을 탈탈 털어간다.

1. "젊은 시절 중년을 바라봤을 때 나는 그들을 어떻게 봤었을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기름지고, 약아빠지고, 교활한 여우처럼 닳고 닳아서 책임은 지지 않으며 비난과 회의적인 시선 일색으로 조롱하기 바쁘고, 행동하기보다 뒤편에서 불룩한 배를 쓰다듬으며 허리를 굽혀 자신의 신발에 묻은 흙먼지도 털어낼 수 없는 그런 중년들을 상징처럼 떠올리곤 했다. 장바구니를 채우기 위해 앞장 서서 목소리를 높이면서, 지갑을 비우는 일에는 인색한 중년의 모습이 싫었으면서도 동시에 고고한 어느 중년의 여유로움이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어린 감독이 이렇게 중년의 일상을 모티브로 담아낸 이유가 뭘까. 그 중 하나는 젊은 시절에 겪는 상실이 주된 내용이 아니라 중년이라서 더 상실의 무게가 크게 느껴지는 지도 모르겠다.



2. 상실과 내일, 이 둘 중 무엇에 비중을 두고 살고 있을까?

영화를 보고 나서도 가끔 이 질문을 되짚어 보곤 한다. 어쩌면 채우기 위해 사는 것이 행복이라며 잘못 정의 내리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행복 지상주의, 소비와 만족감을 채우기 위해 지갑을 노리고 있는 상술에 놀아나고 있는 건 아닐까. 무언가를 갖기 위해 그에 준하는 것을 소비한다. 시간, 돈, 노력, 체력 등등을 갖고 싶은 무엇인가를 위해 계속해서 소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밑 빠진 독이라는 표현을 들어 상실, 공허, 불행이란 것에 비중을 두고 산다.

영화 내용은 전반적으로 어둡거나 슬프지만은 않다. 잔인하게 남편과 남은 미련까지도 떨굴 수 있도록 나이 어린 애인과 함께 있는 남편을 확인시킨다. 상실보다는 배신의 무게와 범벅된 슬픔을 견디지만 그녀의 의상과 화면 분위기는 중립적이다. 오히려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그 와중에 제자랑 썸 타는 분위기가 느껴져 살짝 설레기까지 하며 상상은 이미 클리셰를 넘어선다. 하지만 현실은 중립을 지킨다. 제자도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려 그녀의 삶 밖으로 이탈한다.

3. 중년의 시선

중년, 인생의 정점에서 이제 내려오는 길만 남았을 지도 모른다. 이젠 젊은 열정도 체력도 청춘이 아닐 테다.
저 여린 몸매의 중년의 뒷모습, 그녀에 손에 든 것은 명품 백도 여행 항공권도 아니다.  어디 좋은 해변이라도 관광할 듯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가이드 같은 책 한 권을 옆에 들고 서 있다. 산꼭대기와는 대비되는 옷차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등지고 서 있는 모습이 의연하고 여유롭기까지 하다. 겹겹이 넘어야 할 산들은 아직 많을 테다. 인생의 안내서 같은 책을 들고 여행자처럼 잘 내려가는 일만 남았겠지만 원피스의 무게만큼 홀가분하고 가벼워 보인다. 손 잡고 같이 걸을 배우자도 없고, 울먹거리면 무조건 내 편이 되어줄 부모님도 곁에 없다. 등에 매달린 자식까지도 곁을 떠나고 없다. 상실보단 홀연한 해방감이 전이된다.  그래서 감독은 말하고 싶었나보다. 상실이 아닌 내일의 이야기가 아직 더 남았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 제목이 상실의 표현이 아니라, '다가오는 것들'이란 제목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애제자와의 연결고리, 아도르노의 책

독일 철학자로서 프로이트적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바탕을 둔 아도르노의 분석은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권위주의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지금의 이성은 불의에 맞서고 불합리한 체계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과 권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대용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도르노는 현실 참여, 행동을 발휘한다고 해서 정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의견이다. 반대의 권력이 정의가 되면 다시금 반대 집단이 추구하는 정의로 뒤집혀 행동 양상이 달라지길 반복한다. 그러니 행동이란 것이 그저 집단의 사유를 반영하는 행동 양식일 뿐, 완벽하게 옳다고 정의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행위, 반행위, 저항, 보수, 진보, 지금의 변질된 페미니즘 등등의 사회 운동, 이념과 사상을 통일하고자 행위를 촉발하는 바탕에는 개별성과 특별한 사유를 제거하며 행위, 즉 노동을 저항할 수 없게 만든다.  그 행동은 곧 권력의 희생물이 된다. 이런 내용을 주장하는 철학자이다.

소득이 발생하는 노동은 자본사회에서 즐거움이 아닐 수 없죠. 그러니 매번 얕은 달콤함에 속기도 하는 거겠죠. 이념과 행동의 일치에 관한 생각은 영화에서도 급진적 성격을 띠는 제자와 갈등을 빚게 만듭니다. 그만큼 결정하기 어렵단 이야기란 말이겠죠. 불혹을 훌쩍 넘기고 중년이 된 그녀, 한때는 제자보다도 더 열렬하게 급진적 행동에 참여했던 그녀가 이제는 일상을 위해 더 열심히 발로 뛰며 살게 됩니다. 결국 혼자 남았지만 비로소 그녀는  그녀만의 개별적인 여행을 시작할 겁니다. 다가오는 것들 역시 특별하거나 버라이어티 한 이벤트가 아닐지 모릅니다. 아직 황혼이 이른 한낮에 태양 아래, 붉게 물들어 익어가는 것은 자신의 인생이어야 하겠죠. 황혼을 바라보는 중년의 미학. 급히 행동하지 않는 여유로움, 영화 '다가오는 것들'로부터 젊은 감독이 펼쳐놓은 세계에 빠져 저 역시 다가올 시간들을 정리해보게 되었어요. 프랑스 영화는 어렵다는 편견에 잘 안 보는 편인데, 그 편견을 깨줌과 동시에 영화를 보더라도 기록하지 않는 사람에게 몇 안 되는 인생 영화가 되었습니다. 저도 저 붉은 원피스랑 비슷한 원피스가 있는데, 그래서 그런가 여름이면 생각나는 영화가 되었어요. 현실은 책 한 권 달랑 들고 원피스 입고 산에 올라가면 욕할 것 같아 참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