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세뱃돈,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설날, 세뱃돈,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작년 설이었다. 아침 일찍 차례를 올렸고, 간만에 모인 친척 어르신들께 세배를 드렸다. 오랜만에 듣는 덕담도 좋았고, 다 같이 모여서 먹는 제사음식들도 맛있었다. 직장 1년차를 막 벗어나는 시점이기에, 더 이상 "우리 OO이는 언제 돈 버나?","대학교 졸업은 언제 할래?"등등의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이 너무나도 좋았다. 물론 이제는 그 소재들이 취업에서 결혼으로 단어만 바뀌긴 했지만, 그 정도야 씨익 웃어넘길 수 있으니까.
그래, 다 좋은데 딱 한 가지 걸리는 것은 바로 세뱃돈이었다. 역시 인생은 Give & Take인가, 그동안 받은 것이 있었으니 언젠가 뱉어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처음 겪어보는 출혈에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친가 외가 할머니, 할아버지들 용돈에, 큰 집, 작은 집 부모님들, 이제 막 제대한 사촌동생에, 고3인 사촌동생 그리고 기타 등등. 월급의 30%정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 가족들은 내게서 처음 나온 '보너스'로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대우가 달라졌다. 이제야 비로소 애가 아닌 어른으로 대하시기 시작했고, 무뚝뚝하던 사촌동생은 먼저 다가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건네 온다. 돈이 좋다는 게 이런 얘기일까? 나는 돈으로 가족들의 환심을 산 것일지도 모르겠다. 진짜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있기는 한걸까? 이번 책은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하버드 교수 마이클 센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다.
지난 번 뤼방 오지앙의 <딜레마>이후 접하게 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역시 결국은 딜레마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피부에 와 닿는 딜레마다. 모두가 좋아하는 혹은 좋아하지 않더라도 자유로울 수 없는 '돈'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크게 다섯 가지 챕터 '새치기', '인센티브', '시장은 어떻게 도덕을 밀어내는가','삶과 죽음의 시장','명명권'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센델 교수는 이 주제들과 관련해 현재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하지만 돈으로 사면 왠지 좀 개운치 않은)'의 사례들을 들려주면서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됐는지, 그리고 과연 이대로 괜찮은 것일지에 대한 물음표를 던져준다.
일단 다행인 점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배경이 미국이라는 것이다. 신자본주의로 대표되는 미국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례들을 들여다보면 나도 모르게 깜짝 깜짝 놀라고는 한다. 이 너무나도 합리적인 '어메리칸 스타일'의 거래들을 읽고 있으면 정말 세상이 말세로구나 싶기도 하다. 그들은 경제, 그리고 자본이라는 명분하에 사람들의 시간을 사고, 전통을 사고 심지어는 생활방식까지도 사버린다. 계산기를 두드릴 때 그 어디에도 윤리에 대한 개념은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역시 읽으면서 불행했던 점은 여기 한국도 미국의 뒤를 빠른 속도로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돈이 많아서 무엇을 사고, 돈이 필요한 누군가는 그 무엇을 팔아 돈을 챙긴다. 이러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가 아니냐고 누군가 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센델 교수가 이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사고팔고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공유하는 가치가 돈에 의해 거래됨으로 그 본질이 변색되는 것이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사고팔고의 거래가 결코 공평하지 않다는 것. 즉 사는 사람은 거부할 수 있지만, 팔아야 하는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대부>의 명대사,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나 하지"가 이제는 마피아가 아니어도, 일반인들에게도 적용된다는 이야기다.
이제는 너무나 커져버린 '돈'의 가치를 이길 수는 없어 보인다. 그 대신 미풍양속이란 가치에 대한 마지막 방어선, 즉 최소한의 인간성을 유지하느냐 마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물론 돈이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라면 지금 이대로도 괜찮겠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다수는 그렇지가 못하다. 사는 사람이 아니라 파는 사람의 입장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거래에 대한 자발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그것도 혼자하는 고민이 아닌, 시민들 모두가 같이 생각을 해야한다. 그래야만 그 방어선, 즉 돈 앞의 인간성이 지켜질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책을 덮고나서 생각해보니, 사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이제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아이러니 하지만 이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도 16,000원주고 돈으로 샀다. 낭만이 사라진 시대, 돈이 계급이 되어가는 시대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 것인가? 1월 한 달 동안 <딜레마>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통해 생각해본 고민의 힘. 그 힘의 위력을 잊지 말자. 자유로운 토론이 허용되는 사회, 제도에 인간이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선착순'이라는 줄서기 윤리가 '돈을 낸 만큼 획득한다'는 시장 윤리로 대체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한때 비시장 규범이 지배했던 삶의 영역에 돈과 시장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51p
"경제학자들은 흔히 시장은 무기력해서 스스로 통제하는 재화에 관여하거나 이를 손상시키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시장은 사회 규범에 흔적을 남긴다. 종종 시장 인센티브는 비시장 인센티브를 잠식하거나 밀어낸다." - 98p
"경제학을 인센티브의 학문으로 생각하는 것은 시장의 영향력을 일상생활까지 확대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생각은 경제학자를 행동주의자로 묘사한다." - 125p
"선물에는 어쩔 수 없이 물질적 측면이 있다. 물론 선물에 따라서는 금전적 측면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 않기도 하고 분명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수십 년 동안 현금을 선물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는데, 이는 사회적 삶이 점점 상품화하고 있는 한 예다." - 141~142p
"이타주의, 관용, 결속, 시민정신은 사용할수록 고갈되는 상품이 아니다. 오히려 운동하면 발달하고 더욱 강해지는 근육에 가깝다. 시장 지향 사회의 결함 중 하나는 이러한 미덕이 쇠약해지게 방치하는 것이다. 우리의 공공 삶을 회복하려면 좀 더 부지런히 미덕을 행사해야 한다." - 180p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요점은 시장과 상업이 재화의 성질을 바꾸는 상황을 목격했다면 시장에 속한 영역은 무엇이고 시장에 속하지 않은 영역은 무엇인지 의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화의 의미와 목적, 재화를 지배해야 하는 가치를 놓고 깊이 사고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 274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