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 언니의 직장생활백서] 1편. 여자? 독한 사람? 그게 뭐 어때서!
여자? 독한 사람? 그게 뭐 어때서!
나는 직장생활을 하는 내도록 ‘쎈 여자’로 불렸다. 나와 친하거나 나를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말은 ‘자기주장이 강하다, 리더십이 있다, 추진력이 있다, 열정적이다’와 같은 긍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그런데 정작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드세다, 거칠다’와 같은 부정적인 의미로만 전해졌다.
점심 한 끼 같이 먹는 단순한 관계조차도 사전에 형성된 이미지로 인해 편안하게 흘러가기가 어려웠다. 업무적으로 처음 인사를 나누는 자리도 마찬가지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엄청 센 분이시라는 얘기도……”라고, 아예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부터 대놓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게다가 나에 대한 이런 선입견은 업무적인 협조를 더디게 했다. 나의 센 맛을 보고 싶지 않아 일부러 거리를 두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이런 태도는 일이 진행될수록 나에 대한 호감으로 변하곤 했다.
“정 팀장님, 듣던 것보다 별로 안 세시네요. 처음엔 정 팀장님이 센 분이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엄청 긴장했어요.”
“그래요? 실제로 함께해 보시니 어떠세요?”
“업무를 워낙 적극적이고 추진력 있게 하셔서 보조를 맞추는 것이 좀 버겁긴 하지만, 다른 것은 전혀 불편함이 없어요. 업무만 제대로 하면 다른 부분은 스트레스를 안 주시니 오히려 편한 부분도 있어요.”
이처럼 나의 ‘쎄다’라는 이미지는 대부분 업무적인 면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나에 대한 이러한 평가마저도 장점으로 여기기로 했다. ‘쎄다’라는 평가 안에는 분명 업무적으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는 것이니 오히려 즐기고 활용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쎄다’라는 말은 그나마 긍정의 여지가 있었지만, 종종 듣는 ‘독하다’라는 말은 가끔 상처가 되기도 했다.
서울에 있는 한 지점에서 지점장으로 일하던 때였다. 내가 부임한 지점은 오가는 고객도 많고, 매일 새로운 이슈가 생기는 중심 상권에 속해 있었다. 하루는 회사의 남자 선배가 근처를 지나다 내가 일하던 지점에 들렀다. 업무와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로운 과제가 얼마나 진행됐는지 궁금해해서 그간의 진행 상황을 설명하고, 함께 지점을 순회하며 세부 상황을 공유했다. 그리고 추가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보여 본사에서 내려온 지시 외의 업무까지 자발적으로 진행했다고 말하는 도중이었다.
“독한 년!”
설명을 듣는 내내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던 선배는 나를 향해 욕 같은 칭찬을 던졌다.
“잘했다는 말씀이죠? 다음엔 욕 대신 그냥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세요!”
“그래, 잘했다. 이 독한 년아! 뭘 이렇게까지 하고 그러냐!”
회사에서 내준 과제를 완수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할 정도로 촉박한 일정이었다. 그런데 거기다 알아서 이것저것 덤까지 더 챙겨두었다는 말에 대뜸 돌아온 말이 바로 ‘독하다’였다.
나는 안다. 사람들은 내게 “잘했다”라는 말 대신 “독하다.”, “세다”라는 말로 나를 칭찬한 것을. 여자이기 때문이다. 남자였다면 엄지를 척! 하고 들어주며 야무지다, 근성 있다, 멋지다, 당차다, 패기 있다, 기백이 넘친다 등의 폭풍 칭찬을 했을 일들이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괜히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세다, 독하다와 같은 욕 같은 칭찬을 한다. 처음엔 이런 인사들이 무척이나 기분이 나쁘고 마음이 상했지만, 그 속뜻을 알고부터는 그러려니 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독하다.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강하다.”
몇 년 전 발레리나 강수진이 모델로 출연한 한 스포츠 브랜드의 광고 문구이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무리하느냐고, 그러다 지쳐 쓰러질 거라고, 독하다고 말하지만 결국 그것은 더 나아지고 더 강해지는 과정이라는 메시지가 담긴 광고였다. 2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영상이지만 마치 늘 독하다는 말을 듣고 살던 나를 향한 격려와 토닥임 같아서 코끝이 시큰해졌다.
내가 ‘여자’인 것은 업무와는 전혀 무관한 것임에도 나는 수시로 ‘여자’임을 확인받아야 했다. ‘여자 지점장’에 대한 고객의 노골적인 거부 외에도 고위직 관리자는 당연히 남자일 것이라는 사회적 편견이 빚어낸 씁쓸한 해프닝은 수시로 벌어졌다. 후배 직원들과 함께 협력사와의 첫 미팅에 참석할 때면 어김없이 내 직책이나 직급 앞에는 ‘여성 1호 팀장’, ‘유일한 여성 지점장’과 같이 성 수식어가 덧붙여졌다. 심지어는 나와 함께 간 남자 직원이 당연히 지점장일 것이라고 오해하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 당황한 직원이 “이분이 지점장님이십니다”라고 나를 가리켰을 때 무안해하던 그들의 얼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여자는 쉬운 일, 편안한 일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면에 혹시 여자는 그런 일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자들의 업무에 대한 정의는 난이도나 경중과 관련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 일을 하고자 하는 여자의 의지와 능력에 달려 있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